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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선교를 위한 연구(퍼온글)
김기태 2019-10-11 추천 0 댓글 0 조회 69

 

인도 연구

목 차

 

I. 인도의 자연적 환경

1. 개관

국가/ 인구분포/ 경제/ 군사/ 한국과의 관계

2. 지형

3. 기후

 

II. 인도의 사회문화종교

1. 인도사회 개관

2. 인도의 찬란한 문화전통

3. 인도의 종교

 

III. 인도의 역사정치외교

1. 인도의 역사

2. 인도의 국방

3. 인도의 정치

4. 인도의 경제와 산업

5. 인도의 언론

6. 인도의 대외 외교 관계

 

. 인도 내 기독교와 선교 현황

1. 인도선교의 역사

2. 인도교회의 현황

3. 선교현황과 전망

4. 재 인도 한국 선교사와 선교사역

5. 미전도 종족 선교 정보

 

. 인도 선교의 장애요인과 선교 전략

1. 인도선교 장애요인

2. 인도선교를 위한 고려사항

3. 인도선교 전략

4. 결론

 

참고자료

부록1: 인도 선교사님과의 대화

1. 이용범 선교사님으로부터

2. 최영준 선교사님과의 대화

3. 서 목사님과의 대화

4. 김 선교사님으로부터

 

부록2: 인도여행을 위한 안내 자료

1. 인도 VISA발급

2. 항공편

3. 숙박시설

4. 도시내의 교통수단

5. 통화

6. 음식

7. 언어

8. 자주 묻는 질문들

 

 

I. 인디아 개관

1. 개관

공식국명 : 인도공화국, Bhārat, Bhārata varsha (Hindī) Republic of India (English)

수 도 : 뉴델리 (New Delhi)

공식언어 : Hindī; English

정치의회형태 : 연방공화제, 다당제, 양원제

면 적 : 3287,782(인도 지배하의 카슈미르 포함, 남한의 약 33)

인 종 : 투르크 이란, 인도 아리아, 스키토 드라비다, 아료, 드라비다, 몽고, 몽골로이드 등 일곱 인종

2. 인구

인 구 (1998) : 984,004,000 현재 10억 이상

2010년 약 115천만명에 예상됨

인구 밀도 (1998) : 310.8 /

촌 인구분포(’95): 도시 26.8% ; 농촌 73.2%

성별 분포 (1995) : 남자 51.64%, 여자 48.36%

연령별 분포 (1995)

연 령

15미만

15-29

30-44

45-59

60-74

75이상

백분율(%)

35.2

27.2

19.1

11.2

5.9

1.4

 

출생률(인구1,000명당, 1996) : 25.9 (세계평균 25.0)

사망률(인구1,000명당, 1996) : 9.6 (세계평균 9.3)

자연증가율(인구1,000명당, 1996) : 16.3 (세계평균 15.7)

평균수명 (, 1996) : 59.1 ; 60.3

 

3. 경제

예산 (199697) : 세입 1,982,500,000,000Rs ; 세출 2,297,300,000,000Rs

국내총생산 (Gross Domestic Product, 1996) : 357,759,000,000U.S.$

국민총생산 (Gross National Product, 1996) : 380U.S.$

환율 (1997. 10. 3) : 1U.S.$=36.17Rs

98/99년도 수출

총수출 : 336.4억불 (전년 동기 대비 3.7% 증가)

총수입 : 418.9억불 (전년 동기 대비 7.9% 증가)

무역수지 : 82.5억불 적자 (전년 동기 18.5억불 증가)

 

4. 종교

힌 두 교 : 78.8% (공식적으로는 82%)

회 교 : 12%(14%라고 주장)-카시미르와 라크샤드위프지방이 중심

시 크 교 : 2.0%-대다수가 펀자브에 있는 극단주의자

부족종교 : 1.5%[자이나교 : 0.48% ; 불교 : 0.7% ; 바하이교 : 0.2%]

기 독 교 : 3.9%

 

5. 국방

접경국가: 북으로 파키스탄, 중국, 아프가니스탄,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 및 미얀마와 접경(접경선:15,080Km), 3면이 인도양으로 둘러싸여 있음

총병력수 (1996) : 1,145,000(육군 85.6%, 해군 4.8%, 공군 9.6%, 세계 4-5 위 수준)

국방비: 90년대초 GNP대비 2.88%, 97-98 회계연도 2.20%(감소추세)

방위산업: 전국에 8개 국영 방산업체, 38개 병기공장, 국방연구개발기구소속 전국에 47개 실험소 및 연구소가 있으며 16,000여명의 과학자를 포함, 34,000명의 연구원이 미사일, 항공기를 포함한 각종 신형무기 개발을 주도. 핵무기 보유, 자체 인공위성 발사.

 

6. 한국과의 관계

북한 동시수교(1973)

수출입현황(1996):대한수입액 1,176,965,000U.S.$ ; 수출액 975,718,000U.S.$

교민현황 (1997) : 교민수 39 ; 체류자수 1,190

 

II. 인도의 지형과 기후

1. 지 형

지형적으로 인도는 크게 히말라야 산맥지역, 평야지역, 고원지대의 세 지역으로 구분된다. 지질학적으로 인도의 위치는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으나 20세기 후반 판구조론이 받아들여진 후 오늘날에는 곤드와나 구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인도 반도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아시아 대륙과 충돌하여 히말라야 산맥을 형성하고, 이곳에서 발원하는 하천의 오랜 침식과 퇴적작용으로 인도갠지스 평원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 히말라야 산맥지역

해발 7,500m가 넘는 히말라야 산맥은 세계 최고봉이 10여 개가 있는 세계 최고의 산악지역이다. 해발고도 8,848m로 이 산맥을 굽어보는 에베레스트 산이 네팔티베트에 걸쳐 솟아 있다. 지질학상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생성된 산지에 속하며, 동서로 뻗은 산계 중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으로 중단 없이 2,400이상을 뻗어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빙하들이 히말라야 산계의 주요산맥인 대히말라야 산맥과 카라코람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발달해 있으며 아래로 흘러 내리면서 녹아 북부인도의 여러 강들로 유입된다.

 

. 평야지역

인도갠지스 평원으로 길이 2,400, 너비 240320, 면적 100에 달하는 충적평야지대이다. 이곳에는 인더스갠지스브라마푸트라 강이 북쪽의 산악지역과 남쪽의 고원지역에서 많은 토사를 운반퇴적시키면서 형성한 넓고 비옥한 평야지대가 펼쳐지면서 평평한 저지대를 이루고 있다. 해안지역과 더불어 집약적인 농업이 행해지고 있는 인구밀집지역이기도 하다. 충적평야가 북부의 서벵골비하르우타르프라데시하리아나펀자브 주 대부분을 차지하고 아삼라자스탄 주까지 펼쳐져 있다. 남쪽의 코모린 곶에서 마하나디 삼각주에까지 이르는 동해안 지역에는 인도 남부를 흐르는 여러 강들의 삼각주가 발달했다.

 

. 고원지대

인도반도를 이루고 있는 고원지대(데칸고원)는 지질학적으로 인도의 지형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지형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고대(35억년 전)에 형성된 결정질 암석으로 이루어졌으며, 1967년 마하라슈트라 주의 코이나나가르 지진이 있기 전까지는 지진활동이 거의 없는 비교적 안정적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데칸 고원은 북쪽의 빈디아 산맥을 사이에 두고 인도갠지스 평원과 이웃한다. 그밖에도 아라발리삿푸라마이칼라아잔타 산맥이 뻗어 있으며 동쪽으로 평균고도 600m의 동고츠 산맥을 끼고 있다. 아라비아 해와 서고츠 산맥 사이로 좁은 해안지대가 남북으로 펼쳐지며 벵골 만과 동고츠 산맥 사이에는 보다 넓은 해안지대가 있다. 데칸 고원을 흐르는 대부분의 하천이 서고츠 산맥에서 발원하여 벵골 만으로 유입된다.

 

2. 기 후

인도의 기후는 전체적으로 열대계절풍의 영향을 받는다. 계절풍은 대체로 69월에 습윤한 남서풍이, 122월에는 건조한 북동풍이 분다. 이에 따라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게 교차되고 1년은 크게 다음의 세 계절로 구분된다.

 

. 기후에 의한 지역구분 - 다음의 세 계절로 나뉜다.

첫째,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 건조하고 온화하면서도 때로는 한랭한 112월의 건조한랭기,

둘째, 기온은 매우 높으나 강수량이 적은 36월경의 건조 혹서기,

셋째, 남서계절풍이 불어와 비가 많이 내리고 기온도 높아서 매우 무더운 6월경부터 10월까지의 습윤고온기이다.

그러나 지형과 몬순(남서계절풍)의 도래시기에 따라 지역간에 기온강수량강수일수 등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국가 전체적으로 평균강수량이나 평균기온을 살펴보는 것은 무의미하고 각 지역별로 강수량과 기온을 살펴보아야 한다. 몬순은 남쪽의 인도양에서 북동쪽을 향해 인도에 내습, 5월말에서 6월초에 걸쳐 인도 남서쪽에 비를 내리게 한다. 이 비는 서고츠 산맥과 서해안 지대에 심하게 내려, 인도에서 이 지역들은 최다우지로 손꼽힌다. 이후 몬순은 서고츠 산맥을 넘어서 북동쪽으로 전진하나 동쪽으로 갈수록 강수량은 적어진다. 이어서 아라칸 산맥에 비를 뿌리며 벵골 만을 향해 북상한 몬순은 벵골에 상륙, 실롱 구릉에 부딪치면서 방향을 바꾸어 갠지스 평원을 거쳐 북서쪽으로 향한다. 이 몬순의 도래로 인도는 10월까지 4개월간 우기가 계속되며 이 기간 동안 연강수량의 2/3 이상의 비가 내린다. 몬순의 도래시기와 강수량은 농상의 풍흉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이므로 커다란 국가적 관심사이다.

 

. 강수량에 의한 지역 구분

인도는 강수량에 따라 크게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서부의 아삼메갈라야 주 및 봄베이에서 트리반드룸에 이르는 서해안 지역은 최다우지역으로 손꼽힌다. 메갈라야 주의 체라푼지는 연평균강수량 11,430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다우지이다.

북서부지역, 즉 쿠치까지 뻗어 있는 라자스탄 사막 지역과 서쪽으로 길기트까지 뻗어 있는 카슈미르의 라다크 고원 일대는 이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과우지(寡雨地)로 유명하다. 이 지역의 타르 사막에서는 연평균강수량이 100에 불과하다.

동부 데칸 고원 쪽은 대략 연평균강수량이 1,500정도로 비교적 강수량이 높은 편이고

펀자브 평원에서 서부 데칸 고원에 이르는 지역은 750정도로 비교적 강수량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서고츠 산맥 서사면지역은 남서계절풍의 영향으로 4,000이상의 강수량을 보인다.

인도에서는 기온도 강수량만큼이나 지역차가 크다. 연평균기온이 히말라야 산악지역의 다르질링심라 같은 여름 관청 주재지에서는 1214로 비교적 낮은 반면, 인도갠지스 평원에 있는 델리와 알라하바드에서는 26, 히말라야 산맥 기슭에 있는 데라둔에서는 22, 인도 최고 혹서지인 타밀나두 주의 팔라얀코타이에서는 29.5에 달한다. 해안지대의 경우에는 서해안의 봄베이가 28, 동해안의 마드라스가 29를 기록한다.

 

III. 인도의 사회문화종교

1. 인도사회의 특징

 

. 복합사회적 성격

인도는 지역별로 풍토조건과 인종이 판이하고, 힌두교, 회교 등 다양하고 이질적인 종교, 심한 빈부격차와 높은 문맹율, 종교적 사회적 신분제도 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복합사회임.

 

. 카스트 제도

수천 년간 인도인의 생활을 규율해 온 카스트 제도는 법적으로 폐지되었고 근대화 및 교육의 영향으로 점차 붕괴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인도인의 생활저변에 깔려 있는 독특한 신분제도임. 그 근원은 역사적으로는 아리안 족이 인도를 침입 정복한 후 피지배 원주민과의 차등을 강조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설명되는 바, 피부색, 직업에 따라 승려계급인 브라만, 전사. 통치 계급인 크샤트리아, 상인계급인 바이샤, 노예계급인 수드라로 크게 나뉨. 또한 각각의 카스트 안에는 다시 수많은 sub-caste가 있으며, 카스트에 속하지 않는 최하층계급으로 불가촉 천민(Untouchable)이 있다.

최초에는 엄격하지 않았으나 역사의 흐름과 함께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 불허 등 많은 금기를 지닌 사회규범으로 굳어져 인도인의 생활은 자기가 속한 카스트에 의해 규율되었는데 예컨대 브라만은 반드시 해가 뜨거나 질 때에 기도를 해야 하고 경을 외어야 했다. 이러한 계급질서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인도사회를 안정시키고 결속시키는데 도움을 준 면도 없지 않으나, 사회를 정체시키고 활력을 잃게 하는 등 많은 폐단을 낳았다.

이에 인도의 사회개혁가들, 특히 마하트마 간디는 불가촉천민 제도의 철폐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으며 이들을 '신의 자녀'라는 뜻의 '하리잔'(Harijan)으로 부르면서 힌두 사원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천민보호에 앞장섰고, 오늘날 인도에는 1억이 넘는 하리잔이 있는데 정부에서는 입학, 취업 시 일정비율을 이들에게 배정해 주는 등 혜택을 주고 있어 하리잔 출신의 장관도 배출되고 있으나, 농촌에서는 아직도 카스트 제도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다.

 

. 힌두교의 전통과 관습

수 천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힌두 문화에 바탕을 둔 사회적 관습과 전통은 수세기 동안의 모슬렘, 영국 등 외세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 이를 계승해 왔으며 이러한 오랜 전통사회의 생활양식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

 

2. 인도의 찬란한 문화전통

인류 4대 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을 탄생시킨 인도의 문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날까지 융성해 왔다. 힌두 문명의 바탕 위에 외래문화를 수용하여 독특하고 개성적인 문화를 창달해 온 인도는 자기문화에 대한 깊은 애착과 자부심을 가지고 미술, 조각, 문학, 음악 등 문화전반에 걸쳐 인류사에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 베다 문화(B.C. 1500 - 600)

아리안족의 침입 후 형성된 베다 문화는 인도의 종교, 사회, 관습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힌두교를 탄생시켰으며 성전의 집대성과 대서사시 등 문학을 발전시켰다.

 

. 불교문화(B.C. 600 - A.D. 1100)

불교문화의 전성기는 아소카대왕 시대로서 산치, 녹야원의 석탑, 아잔타와 엘로라 동굴의 조각미술 및 건축예술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아울러 불교는 이 시기에 중국, 한국 등 북방으로 전파되었다.

 

. 모슬렘문화(A.D. 1100 - 1600)

모슬렘 문화는 특히 건축에서 페르시아 및 힌두의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룬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으며, 종교적 관용으로 이슬람교, 힌두교를 통해 우르두어를 탄생시키는 등 언어, 문학, 음악, 미술분야에서 많은 공헌을 했다.

 

. 서구문화의 영향(A.D. 1700 - 1947)

250년간 영국의 지배하에서 인도예술, 특히 전통회화 분야는 서구예술의 영향을 받아 많은 변화를 보임. 또한 영어의 도입과 함께 인도인의 생활양식에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인도인의 생활에 절대적인 요소인 종교 면에서 힌두 문화는 그대로 계승되었다.

 

3. 인도의 종교

. 개관

'종교의 나라'로 불리는 인도는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의 발상지이며, 수세기에 걸친 회교도 및 영국의 지배에서 회교와 기독교가 전파되어 각종 종교가 공존해 왔다. 인도정부는 이들 제종교의 평화적 공존을 보장하여 사회적 통합을 기하고 있는바, 종교 세속주의원칙(Secularism)은 인도 헌법의 주요 요소이며 국시라 할 수 있다. 힌두교 이외에도 이슬람교, 기독교,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가 소수종교로서 인도인의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며, 인구대비 분포비율은 힌두교 85%, 회교 12%, 시크교 3%, 기독교 3-4%, 불교 1%, 자이나교 1%로서, 힌두교가 압도적이며 이중 회교와 기독교는 외래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인도에서 기원한 불교와 자이나교, 힌두교, 시크교의 4종교 가운데 불교는 기독교와 같이 세계종교로서 발전하였고, 힌두교는 오늘날 인도 인구 가운데 80% 이상의 추종자를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종교로서 기원전 1500년경 인도 대륙에 침입하기 시작한 아리안들의 종교인 브라만교가 민간신앙을 흡수, 대중화한 것이다. 1947년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에도 불구하고 인도에는 아직 약 11%가 넘는 이슬람교도들이 있으며, 이슬람교도가 절대다수인 카시미르지역의 귀속을 둘러싸고 파키스탄과 두 차례 전쟁을 치렀고, 이슬람교도 밀집지역인 인도북부 우타르 프라데시주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1992년 힌두교도들에 의한 바브리 마스지드 이슬람교사원 파괴직후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간의 유혈충돌로 300여명 사망). 15세기경 회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힌두교 개혁종파로 창시된 시크교는 푼잡주에 교도가 밀집되어 있으며, 1980년대 초 과격파 시크 분리주의자들이 소요를 야기한바 있으나 현재는 사태가 진정되고 있다(1985년 인도 정부군의 시크사원 진입에 반발, 시크교도에 의한 인디라 간디수상 암살).

기독교는 인도 남부지역에 약간의 기반이 있고 동북부지역에서는 중심종교이나(주민의 80%이상)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지는 않고 있으며, 불교는 인도에서 수백년간 융성하다 1세기 경 힌두교에 흡수되어 현재는 인도의 불교는 신앙으로보다는 유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형편이다. 1950년경 인도 하층계급의 지도자 Dr. Ambedeka 가 힌두교의 카스트제도를 벗어나는 방편으로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의 20여만명의 하층민들을 데리고 불교로 개종한 일이 있으나 종교, 정치적 세력으로는 미미하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동시대에 힌두교의 일파로 창시되었으며, 교리 및 관행 등 여러 면에서 힌두교 및 불교와 유사함. 교도들이 주로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인도 서북부지역의 상업계에 어느 정도 세력을 가지고 있다.

 

. 힌두교

힌두교의 원어는 Hinduism으로 Hindu'큰 강'을 뜻하는 Sindhu의 페르시아 발음이며 인더스(Indus), 인디아(India)라는 어휘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어원적으로는 북서 인도의 강 이름, 혹은 강 주변의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었으나, 후대에 와서 힌두스탄이나 인디아와 같이 인도전체를 나타내는 말로 전이되었다. 그러므로 어원적으로 볼 때 힌두이즘은 인도교, 즉 인도에서 발생하여 성장한 모든 종교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나, 일반적으로 힌두교라고 할 때는 '베다'의 권위와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는 비정통적인 자이나교와 불교를 제외한 나머지를 가리킨다.

. 자이나교와 불교의 등장

B.C 6세기에 인도는 브라만 중심의 농촌경제 시대에서 전사계층인 크샤트리아와 상공업에 종사하던 바이샤가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인 면뿐 아니라 종교, 사상적인 면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는데 베다와 브라만의 권위를 무시한 자유 사상가 무리의 등장이 그것임. 그리고 이들 가운데서도 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세력은 바로 자이나교와 불교이다. 이들은 각각 독자적인 사상체계와 경전, 교단조직을 남겼다. 자이나교의 창시자는 마하비라(Mahavira, 대웅)라고 존칭되며, 불교의 창시자는 붓다 (Buddha, 각자)라고 존칭되고 있다.

 

. 자이나교

인도의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이나교도 삶을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끝없는 윤회와 속박으로 보며, 그 원인은 개개인이 지은 행동(카르마)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윤회에서 해방되려면 카르마를 소멸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카르마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함. 자이나교에 있어서 구원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아니라 오직 개인 각자의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되므로 신은 자이나교에서 중요시되지 않는다. A.D. 8세기에 자이나교는 북인도를 중심으로 마하비라의 가르침을 보다 자유롭게 해석하여 여성의 출가나 구원을 인정하는 보다 대중적인 Svetambara(백의파 : 나체를 거부하고 흰옷 착용을 인정한데서 오는 명칭)와 남인도를 중심으로 보다 보수적이고 수도승은 옷을 입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Digambara(공의파)로 나뉜다. 그러나 순수한 형태의 자이나교도는 현재 약 200만명 정도에 불과하고 주로 봄베이와 구자라트주에 거주하고 있다. 자이나교도는 종교적 실천방식에 따라 (1) 출가하여 엄격한 고행을 하는 소수의 수도승, (2) 가정을 유지하는 승려 등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자이나교의 경전은 아가마(가르침) 혹은 싯단타라고 불리며 자이나교도들은 이를 제자에게 베푼 마하비라의 직접적인 교시라고 믿고 있다. 자이나의 아힘사(불살생)와 고행에 대한 강조는 힌두교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마하트마 간디의 아힘사 사상에도 반영되었다. 철저한 불살생 교리 때문에 자이나교도에게는 생명을 살해하거나 그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직업, 즉 군인, 도살업, 피혁공, 심지어는 농업까지도 금지되어 이들은 상업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은 정직성과 도덕성에 대한 신용으로 뛰어난 상인이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고행과 자발적 가난을 중시한 자이나교도들은 생명에 대한 존중 교리로 지금은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이 되었다.

 

. 불 교

불교는 B.C 6세기경 고타마 싯다르타(Gotoma Siddhartha)에 의해 창시되어 세계 종교로 확대, 발전되었다.

인도문명의 구심점이 서북부 지역으로부터 갠지스강 중류지역으로 옮겨지면서 인도는 브라만 중심의 봉건적 농업경제에서 전사와 상인계급 중심의 사회로 바뀌었는데, 종교적으로도 종래의 제식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사상과 구원의 길을 모색하는 자유사상가 내지 사문그룹이 대두하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이런 사문의 한 사람으로 출발하여 마침내 독자적인 사상과 실천을 통해 붓다의 경지를 실현하였다. 붓다의 사상은 삼법인, 사성체, 팔정도, 연기설로 집약되는데, 인도불교에 있어 최대의 사건은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의 불교귀의와 포교사업으로서 이를 계기로 인도불교는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파되어 오늘날 남방불교의 기원이 된다. 이후 굽타왕조 등을 거치면서 북방불교(대승불교)로 발전, 오늘날의 중국, 한국, 일본 불교의 기원을 이룩하였다. 한편 인도에서는 불교가 힌두교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점차 힌두화 되어갔고, 다른 한편 이슬람세력에 의한 사원의 파괴와 재정적 지원자의 소멸로 그 세력이 약화되어 갔는데, 근래 스리랑카의 포교활동과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으로 약 3백만 정도의 불교도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시크교

600만 정도의 추종자를 가진 인도의 소수종교로서 주로 북인도의 펀잡지방 주민들에 의해 신봉되는 시크교(Sikhism)16세기경 구루(Guru,지도자) 나낙(Nanak, 1469-1538)에 의해 창시되었다. 오늘날 시크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 인정받고 있지만 본래는 힌두교에 있어서의 하나의 개혁운동으로 볼 수 있으며, 자이나교나 불교와 달리 이슬람교로부터 중요한 요소를 병합한 일종의 힌두-이슬람의 종합이다. 처음에는 평화적 성격을 띠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핍박에 저항하기 위한 전사조직이 만들어졌는데 이때 머리카락과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 터번을 두르며, 짧은 바지, 손목에 철제 팔찌를 끼고, 단검을 차는 시크교도의 특징이 만들어졌다. 주로 펀잡 지방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총 종교인의 약 3%를 차지한다.

IV. 인도의 역사, 정치, 국방, 외교

 

1. 인도의 역사

 

, 연대기

B.C.

2500인더스 문명-인도사의 기원

1500년경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의 유적 기원. 아리안 서북 인도로 진입, 1000년경 강가 유역에 들어옴

1200년경 리그베다 성립

600년경 북중부 인도에 16왕국, 마가다국의 번영

566486 부다(석가모니)의 생애, 자이나교를 연 마하비라도 동시대로 추정

327325 알렉산더의 인도 원정

321 찬드라 굽타가 마우리아 왕조 세움

268 아소카 왕 즉위, 남단 제외한 전 인도 통일, 불법을 통치이념으로 함

A.D.

150년경 쿠샨 왕조 전성기, 카니슈카 왕이 불교 보호, 대승불교 성립

320 찬드라 굽타 세가 굽타 왕조 세움, 굽타 왕조 시대에 인도 통일(5C), 브라만교는 힌두교로 발전

753 데칸에 라슈트라쿠타 왕조 성립

8301203 찬드라 왕국

12061526 델리를 왕도로 5개 왕조 교대

1498 바스코 다 가마 내항

1526 파니파트 전쟁. 몽고의 피를 받은 바부르가 무굴 제국 창시

1556 악바르 황제 즉위

1600 영국, 동인도 회사 설립

1757 프라시 싸움, 그 후 지방으로 독립한 세력에 영국, 프랑스가 합세하여 마이소르 전쟁마라타 전쟁 등을 치름

1819 마라타 세력을 격파한 영국이 인도 식민지 지배를 시작

1857 대반란-세포이의 항쟁

1858 반란 진압, 영국이 인도를 직접 통치, 무굴제국 멸망

1885 인도 국민의회 성립-독립운동의 전진

1913 시인 타고르 노벨상 수상

1920 간디 불복종 운동 개시

1947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1948 간디 암살

1950 인도 헌법 공포, 공화국 성립

1971 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방글라데시 독립

 

. 인더스 문명기 (기원전 3000-2000)

인도에는 두개의 큰 강이 대륙을 관통하고 있는데, 히말라야에 발원하는 갠지스강은 동부 인도로 흘러서 벵갈만으로 빠져나가고 인더스강은 서부를 거쳐 아라비아해로 빠져나간다.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기원전 3,000~2,500년경부터 약 500년간 번성한 고대 문명을 일컫는다. 인더스 문명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등에 유적을 남기고 있는데, 유적을 통해 본 문명의 수준은 메소포타미아, 수메리아 등에 버금가는 세련된 문화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는 질서정연하게 도시계획이 된 고대 도시로서, 벽돌로 이루어진 가옥과 도로, 하수시설 등이 발달된 도시였다. 인더스 문명은 고도로 발달된 후기 청동기 문명의 단계로, 종교는 다신교였으며 정치 체제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체제였고, 인더스강 유역의 최초의 주민은 프로토오스트랄로이드(버마, 말레이계 인종)로서 검은 피부와 납작한 코를 가진 중간키의 인종이었다.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문명을 일으킨 인종은 드라비다임. 그들은 그리스, 소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

 

. 아리안 문화 (기원전 2000-1000)

인도 문화의 원형은 상당부분 아리안족이 인도 대륙을 침입하여 정착하면서 이루어졌다. 아리안족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이었으나, 기원전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하여 수세기간 정착한 후, 다시 각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인도에 이주한 아리안인은 페르시아에 정착해있던 부족으로서 인도-이란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기원전 2000-1500년경 인더스강 유역에 침입, 드라비다인을 정복하였다.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인들은 처음에는 펀잡 지역에 정착하다가 서서히 갠지스강 유역을 따라서 동부로 옮겨가서 기원전 800년에는 벵갈 지역까지 이동. 아리안인들은 정복민족으로서 카스트의 상층부를 형성하였다.

인도의 계급은 크게 (1) 승려 및 사제계급인 브라만, (2) 전사. 지배계급인 크샤트리아, (3) 상인계급인 바이샤, (4) 노예계급인 수드라, (5) 불가촉천민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것은 마누(Manu) 법전에 명기된 이래 전통적 관습으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근대화를 제약하는 악습이 되고 있다. 아리안 문화의 특징은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신을 찬양하고 경건히 예배드리는 법식이 발달하였다는 것인데, 특히 신에게 제사드리는 의식을 담당한 사제 계급인 브라만을 중심으로 제사 의식과 신에 대한 찬양 등이 집대성된 베다문화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베다에는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 등이 있으나,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리그베다임. 나머지 베다들이 주로 제사의식의 형식에 관한 내용들인데 비해 리그베다는 신에 대한 찬가일뿐 아니라 인간성의 작용, 세계의 근원과 천지창조 등에 관한 철학적 사고를 망라한 인류 최초의 문학적 성전이라 할 수 있다. 베다 시대(기원전 1500-600)에 이어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푸라나등 경전에 입각한 힌두교 발생하였다.

 

. 도시국가의 형성기

펀잡 지역에서 갠지스강 유역으로 진출한 아리안인들은 서서히 도시국가를 형성하여 기원전 7세기경에 이르면 이미 상당한 세력을 지닌 도시국가들이 생겨났다. 이 당시의 국가형태는 부족연맹과 전제왕권의 중간형태를 취하고 있다. 거의 모든 국가는 본질적으로 부족연맹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원시적인 공화 정치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왕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당시에 유명한 국가들은 거의 갠지스 강의 동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특히 유명한 나라들로는 코살라, 비데하, 카시, 마가다, 앙가, 아반티 등임. 기원전 7세기에 이르러 인도 북부에는 코살라, 중부에는 마가다, 남부에는 비데하 등이 중심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서로 각축하게 됨. 도시국가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정복전쟁을 야기했고 약육강식의 전쟁은 기원전 4세기경까지 이어졌다. 이 정복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이는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BC 582 - 554) 대왕이었는데, 그는 주변의 소국들을 차츰 합병하고 내치를 공고히 함으로써 대제국의 기반을 닦았고, 그의 아들 아자타 사트루는 부왕의 뒤를 이어 카시, 코살라, 비데하 등을 차례로 정복하여 명실공히 인도 대륙의 강자로 부상하였다. 마가다 왕국은 알렉산더의 침입 때까지 난다 왕조와 더불어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였고, 기원전 500년경 불교 및 자이나교 발생하였다.

 

. 마우리아 제국

마가다국의 크샤트리아 계급출신인 찬드라 굽타는 기원전 321년 난다 왕조를 멸망시키고 마우리아 왕조를 건립,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쪽으로는 벵갈만에 이르는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왕국을 건설함. 3대왕인 아소카왕(BC 272 - 232)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남서부의 타밀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하였다. 아소카왕의 업적중 특기할 만한 것은 불교진흥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점인데, 특히 석가모니 사후 사라져 가는 불전을 수집, 정리하였으며 백성들에게 불교문화를 전파함은 물론, 포교사절을 서쪽으로는 시리아, 이집트, 그리스, 마케도니아까지, 동남쪽으로는 미얀마까지 파견하였다. 또한 스리랑카에 왕자를 보내 포교함으로써 남방불교의 중심지가 되게 함은 물론,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기원전 185년 마우리아 왕조의 군사령관이었던 푸샤미트라는 마우리아 왕조를 멸망시키고 숭가왕조를 세웠으나 기원전 70년에 망하였다.

 

. 쿠샨왕조 (AD 78-226)

AD 78년 박트리아 지방의 쿠샨족의 카니슈카왕이 서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중국의 한 왕조, 남쪽으로는 인도대륙의 중심부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였으나 226년 이란지방에 기원을 둔 사산 왕조에 의해 멸망됨. 이후 인도는 많은 소국으로 분열되었으나 후에 동방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에 의해 다시 통일되게 되었다. AD 100년 대승불교가 발생하였다.

 

. 굽타왕조 (380-606)

찬드라 굽타 1세가 굽타왕조를 세움. 찬드라 굽타 2(380-413) 시대에 황금시대로서 문화적 르네상스 구가하였으며, 굽타왕조 초기 및 전성시대에 불교 융성, 말기에는 힌두교 및 자이나교가 부흥하기 시작. 찬드라 굽타 2세 시대부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훈족등의 침입이 개시되었다. 굽타왕조는 606년 훈족에 의하여 멸망함. 훈족등 중앙 아시아인은 라즈푸트인으로 가칭하면서 굽타왕조의 영토에 힌두 및 자이나교 왕국들을 세웠다.

 

. 무굴제국 (1526-1858)

12세기 이후 이슬람의 인도 침입이 본격화되면서 1526년 티무르의 5세손 바베르에 의해 이슬람 왕국인 무굴제국이 건설되었다. 그의 손자 악바르대에 이르러 데칸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대제국이 건설되었고, 악바르 이후 150년간 전성시대 지속하였다. 특히 샤 자한(1627 - 1658)과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1658-1707)시대에 이슬람교가 번성하여 오늘날 타지마할 등 이슬람 관련 유적을 많이 남김. 16세기초에는 구루 나낙이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절충, 일신교인 시크교를 창시함. 무굴제국은 이란 지역의 이슬람교도 침입, 1757년 영국과의 플라시 전투, 1857년의 세포이 반란을 거쳐 동인도 회사의 해체와 함께 1858년 영국의 직할지로 편입됨.

 

. 반영 독립투쟁과 건국

많은 정치단체가 18세기 후반에 생겨났으나 인도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중심 조직은 1885년 소집된 인도 국민회의가 맡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대한 영국의 냉담한 반응은 국민회의파를 점차 과격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벵갈의 분리(1905)는 전인도인들의 분노를 사 보이콧 및 스와데시 운동이 전인도로 파급되었다. 이에 대해 영국은 분할통치 정책을 취하여 모슬렘과 힌두교도간 대립을 조장하였으며, 1906년에는 국민회의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모슬렘 연맹이 결성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인도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영국을 지지하면서 인도인이 영국에 적극 협조할 것을 호소하였다. 특히 바수(Basu), 진나(M.A. Jinnaj) 등 국민회의 대표들은 영국측에 대한 협조를 다짐하였고, 그리하여 막대한 수의 의용병과 군수물자 제공되었으며, 인도 병사 120만명중 80만명이 전투요원이었다. 이러한 영국에 대한 협조는 전후 인도의 자치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다. 자치운동은 1917년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영국의 인도상 몬타규(Montagu)의 성명은 인도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9181월 소위 몬타규, 쳄스퍼드 보고서가 발행되고, 이것이 1919년 인도 통치법이라는 명칭으로 공포됨으로써 인도인들을 크게 실망시켰고, 납세기준에 따라 남성의 10%만이 선거권을 갖고 여성의 참정권이 무시된 인도 통치법은 진정한 지방자치를 허락하지 않아서 인도인의 전쟁 협조에 대한 보상으로서는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민회의내의 온건파와 과격파가 9년만에 다시 대결하게 되었고, 그 결과 창립이래 계속 온건파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국민회의는 1917년 이후 간디(M. Gandhi, 1869 - 1948)등이 이끄는 과격파에 의하여 완전 장악되었다. 과격파인 마하트마 간디는 만약 인도가 영국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전쟁이 장기화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을 지지하였던 것인데 전후 요구대로 자치가 보장되지 않고, 오히려 19192월에 발표된 로왈라트법(Rowalatt Act)은 영국정부가 인도에 대해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자, 1920년 국민회의에서 평화롭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불복종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불복종운동은 영국 정부가 제정한 법률과 규정을 준수하지 말자는 적극적인 운동이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영국 상품의 배격, 파업, 납세 거부 등 불복종운동이 벌어졌으며, 이에 당황한 영국정부는 향후 분리통치를 실시하겠다고 하면서 이슬람교 연맹을 회유하였으나, 이슬람 교도들은 도리어 간디와 협력하여 반영운동에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힌두-이슬람교 제휴의 반영운동을 힐라파트운동(Khilafat Movement)이라 한다. 이슬람 교도들은 무굴제국이 멸망한 후 칼리프의 지위를 유지해 온 터키왕을 정신적 지주로 생각해 왔었는데, 1차대전 결과 터키제국이 분열됨에 따라 영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것이 힌두-이슬람 제휴의 배경이 된 것이다. 간디와 이슬람 교도들이 연합한 반영운동에 대처하기 위해서 영국 정부는 반영 인도 요인들 에 대한 체포, 살인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간디는 영국 정부의 강경책에 대응해서 민중들이 폭력을 사용하여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을 저지시키면서 비폭력의 불복종운동을 더욱 강력히 전개하였고, 1927년 마드라스에서 열린 국민회의에서 인도의 지도자들은 2년 이내에 자치령으로 승격할 것을 영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영국의 정책은 국민회의내에 과격파의 부상을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와 1929년에는 과격파 네루 (Jawaharale Nehru, 1889 - 1964)가 국민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네루는 국민회의의 유일한 목적이 독립이라고 선언하고 이를 위해 간디에게 국민회의의 전권을 위임하였으며, 이에 간디는 다시 불복종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힌두측을 대표한 간디와 함께 반영 힐라파트 운동을 전개한 이슬람교 대표는 알리 형제였으나, 후일 파키스탄 분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진나(M.A. Jinna)는 처음부터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에 찬성하지 않았다. 원래 진나는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의 화합을 주선하는 등 국민회의에 성실하게 참여하였으나, 합법적이고 점진적인 영국의 정치적 개혁에 깊은 신뢰감을 갖고 있었던 진나는 국민회의의 성격이 변질되자 국민회의와 결별하고 활동 무대를 이슬람교 연맹으로 옮겨 1924년 동 연맹의 의장이 되었다.

1939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국민회의는 인도 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으며 이에 영국은 자치령(Dominion)의 지위를 허용코자 하였으나 국민회의는 이를 거부하면서 Quit India를 요구하였고, 한편 모슬렘 연맹은 영국에 고무되어 파키스탄의 분리를 요구하였으나, 도리어 많은 모슬렘으로부터 반발을 받았다. 종전 후 영국은 인도에 독립을 부여키로 결정하고, 인도, 파키스탄 분리안을 내놓았다. 1946년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총선 결과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 정부가 수립되었다. 애틀리(Attlee)의 영국 노동당 정부는 인도가 영연방의 일원으로 남기를 희망하면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화해를 도모하고자 각료사절단을 인도에 파견하였다. 각료사절단은 파키스탄 분리는 반대하면서도 힌두 다수의 A지역, 이슬람교 다수의 B지역, 이슬람교가 약간 우세한 C지역으로 나누는 안을 제시하였고, 이에 진나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구성을 놓고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 사이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는데, 이슬람교 연맹은 국민회의 대표와 이슬람교 대표의 동수를 요구하였으나 각료사절단은 이를 거부하였다. 간디는 각료사절단에 대해 처음에는 호의적이었으나 C지역의 형성으로 벵갈주와 아쌈주가 병합될 경우 이슬람교에 의해 전지역이 지배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태도를 바꾸었다. 네루가 다시 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46년 각료사절단의 계획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자 진나가 이를 비난함으로써 통일 인도의 마지막 가능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인도 총독은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을 화해시키기 위해 간디와 네루에게 접근하여 각료사절단이 제시한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으나 거부당하였다.

한편 애틀리는 19486월 이전에 인도의 정권 이양을 발표하고 이를 위해 마운트배튼 (Mountbatten)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19473월에 취임한 마운트배튼은 가능하면 더 빠른 기간안에 정권 이양을 추진하기 위해 국민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하였는데, 국민회의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네루나 파텔은 모두 인도-파키스탄의 분리에 긍정적인 입장이었으나 간디는 분리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후 간디의 영향력이 현저히 쇠퇴하면서 국민회의의 주도권은 네루와 파텔에게 넘어갔다. 인도의 분리와 두 자치령 탄생에 대한 마운트배튼의 분리 계획안은 모든 정당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영국 정부도 이에 동의하였다. 1947815일 약 200년 동안의 영국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인도인들의 희망은 달성되었으나 인도 대륙에서 수천 년의 전통을 이어온 인도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었다. 네루는 델리에서 인도의 초대수상에 취임하였고, 진나는 카라치에서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 전후 정치정세

1947815일 인도는 마침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각각 분리 독립하였고, 1950년 인도는 연방제와 민주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헌법을 채택하였고, 네루 수상이 독립이래 1964년까지 신생국 인도를 이끌었다. 1962년에는 중-인 국경분쟁이 일어났으며, 1965년에는 캐시미르를 둘러싸고 인-파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네루 수상 사망 후 20개월만에 그의 딸 인디라 간디가 수상에 취임하였고 1971년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인도는 같은 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지원하여 성공적으로 인-파 전쟁을 수행하였고, 방글라데시의 독립으로 인도는 인도 대륙에서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75년 여당의 선거 부정 혐의를 둘러싼 정치적 분규와 경제난국으로 정계가 혼란에 빠지자 간디 수상은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야당, 사법부, 언론에 통제를 가했다. 그러나 아들 산자이 간디를 등장시킨 이후 야당 탄압, 가족계획의 무리한 시행 등으로 인기를 잃어 간디 정권은 77년에 실권, 이후 모라지 데사이가 이끄는 자나타 정권이 수립되었다. 자나타 정권 역시 정치적 안정을 기하지 못하고 1979년에 붕괴되었으며, 챠란싱 과도정부를 거쳐 1980년 선거를 통해 간디 수상이 재집권하였고, 간디 수상은 재집권 이후 제9회 아시안 게임, 7차 비동맹 정상회담 및 영연방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인도의 대외적인 지위를 높이는데 성공하였으나, 1982년부터 시작된 시크 문제 등으로 대내적으로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던 중 19846월 시크교도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골든 사원에 군대를 투입한 것이 화근이 되어 1984. 10. 31 자신의 시크 경호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인디라 간디수상 피살 직후 수상으로 선출된 그녀의 장남 라지브 간디는 국민들의 동정심을 의식, 조기 총선을 선포하였으며 198412월에 실시된 제 8차 총선에서 총 의석 508석 중 410석을 차지함으로써 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고 1984. 12. 31일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다.

라지브 간디 수상은 집권이래 펀잡 문제 및 캐시미르 문제 해결, 경제개혁 등을 추진하였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또한 정부의 무기발주 구입을 둘러싼 고액의 뇌물수수 사건 등 정치 스캔들이 연속적으로 폭로, 라지브 간디 수상의 신뢰도 및 지도력이 약화되던 중 89. 11월 실시된 총선에서 제 1위 의석 (194)을 차지하긴 하였으나 1984년 총선시 획득의석인 401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참패를 당하여 신정부 구성을 포기함으로써 제2위 의석을 차지한 Janata Dal당의 싱(V.P. Singh)이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Singh 신정부는 어느 단일 정당도 과반수를 얻지 못해 연립정부가 불가피한 현실 속에 제3당인 인도 인민당 (BJP,86), 공산당계의 CPI CPM(44)의 외곽지원을 받아 89. 11월 연립정부가 아닌 소수 단독정부로 출범하였으며(BJP, CPI, CPM은 입각치 않음), 싱정부는 1년여의 집권기간(89. 11- 90. 11) 동안 신연방 고용정책, 힌두-회교도간 대립문제를 놓고 자신을 지원하는 인도 인민당과 마찰, BJP가 지원을 철회함으로써 사임하였다(90. 11). 싱 사임후 싱이 이끈 자나타달 당내의 라이벌인 찬드라 세카르가 자파세력(50여명의 의원) 및 라지브 간디의 지원(200)을 받아 199011월 수상에 취임하였으나, 그러나 국민회의당과의 정치적 반목으로 세카르 수상은 취임 4개월만인 91. 3. 6 사임함. 벤카타르만 대통령은 3. 13일부로 하원(임기 5, 정원 545)을 해산, 과도 정부 총리에 세카르 전 총리를 임명함. 91. 5. 20 - 26간의 제10차 총선거 도중, 5. 22 라지브 간디 전수상(Congress I당 총재)이 인도 남부 마드라스시 근교 40지점에서 피살당하였다.

라지브 간디의 피살은 스리랑카 타밀 분리주의자의 독립투쟁을 진정시키기 위해 스리랑카 정부와 협정을 체결, 인도 평화유지군을 파견한 것에 대한 타밀 게릴라들의 보복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지브 간디의 사망으로 6. 12로 총선을 연기, 선거결과 Congress I당이 총의석 506석중 223석을 획득함으로써 과반수에는 미달이나 제 1당으로 집권하였고, 91. 5 Congress I당내 파벌간 타협으로 Narasimha Rao 전 외상이 수상 겸 Congress I당총재로 취임하였다.

 

. 12대 총선 이후의 정치상황

96. 4. 27 - 5. 7간 실시된 인도 총선에서 개표가 완료된 534석중 BJP 연합이 186석을 획득, 136석에 그친 집권여당 Congress를 누르고 제1당으로 부상하였고(NF/LF 연합 111, 지역정당 기타 101), BJP는 집권에 필요한 과반수인 268석에는 82석이 부족하였으나, 샤르마 대통령은 제1당인 BJP의 바즈파이 당수에게 조각을 권고함으로써 바즈파이 당수가 5.16 총리에 취임하였다. BJP는 그동안 지역정당 및 군소정당을 대상으로 연정구성을 위한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대부분의 정당들이 힌두 원리주의자인 BJP에 대한 지지를 거부함에 따라, 5.31로 예정된 하원 신임투표를 앞두고 BJP 정부는 5.28 내각 총사퇴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샤르마 대통령은 5. 28, Janata Dal 주도 United Front(14개 정당 연합)Godwa 당수에게 조각을 권고, 고우다 당수는 국민회의당 및 공산계열 정당들의 외곽지원을 받아 6.1 총리에 취임하였다.

1997.4. 국민회의당의 Kesri 총재는 국민회의당이 주도하는 연정을 모색하기 위하여 United Front 연정에 대한 외곽 지원 철회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United Front 연정은 국민회의당 주도의 연정보다는 새로운 총선을 선호함에 따라 국민회의당은 총선보다는 United Front 주도 연정을 계속 지지키로 입장 전환. 국민회의당과 United Front 연정간의 타협에 따라 Janata DalI.K. Gujral 내각이 출범하였다. 1997.12. Jain Commission(라지브 간디 암살 조사위원회)의 임시보고서에서 DMK(Tamil Nadu주 지방 정당)의 연루 가능성 발표와 관련, 국민회의당은 DMK를 연정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Gujral 연정이 이를 거부하자, 국민회의당이 지지를 철회함에 따라 대통령은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결정하였다.

1998.2-3 하원 총선 결과, BJP 및 연합정당이 252석을 획득하여 제1정당이 되었으며, 국민회의당 및 연합정당은 167석을 획득하여 제2정당이 되었고, 1998.3.19. BJP 주도의 연정(AIADMK, SP 18개 정당 참여) 구성되었고, 3.28. Vajpayee 내각(BJP) 출범하였다. 1998.5.11 5.13 라자스탄주의 Pokhran에서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1999.4.17 바즈파이 내각, 신임동의안 부결(찬성 269, 반대 270)되었고, 1999.4.26 하원 해산, 자브파이 과도 내각체제(99.4.17- )가 출범하였다.

 

3. 인도의 정 치

 

. 인도정치의 특수한 여건

1) 긍정적 측면

민주의식

350년간의 영국 통치기간을 통해 서구적 민주주의 의식은 국민생활에 보편화되어 있다. 도시와 지방, 상류층과 하류층, 식자와 문맹자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개인적 자유에 대한 존중,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해결, 다수결에 대한 승복 등 민주적 사고방식은 체질화되어 있어서 인도 정치 체제 유지에 보이지 않는 큰 기둥이 되어 있다.

언론자유

개발도상국 중에서 인도만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나라는 별로 없을 정도이며, 언론 자유의 보장은 이 광대한 국가에서의 여론정치 구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관료제도

직업공무원제도의 확립은 인도 국내정치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며, 최고의 교육과 전문기술을 구비한 이들 관료층은 그 자체가 하나의 뚜렷한 계층을 이루고 있으며, 국정집행의 핵심체로서 정치권으로부터 확연히 구분되어 있다.

군부의 중립성

군부의 중립성 유지는 인도 정치면에서 또 하나의 특징이다. 군부는 정치로부터 엄정 중립을 유지하며 군부가 정치에 개입한 예는 과거 한번도 없었다.

2) 부정적 측면

카스트제도

인도의 사회적 고질인 카스트제도의 타파, 특히 전체 국민의 21%에 해당하는 최하층 천민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문제는 인도가 안고 있는 큰 어려움중의 하나이며, 교육, 고용 등 여러 분야에서 이들을 중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방에서는 폭력 충돌사태가 빈발하고 있다.

종교의 대립

83%를 점하고 있는 힌두교도와 13%의 이슬람교도는 두 종교간의 대조적 교리, 전통 등의 차이로 항상 반목, 대립의 소지를 안고 있다. 정부의 이슬람교도 포용정책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도 들은 소수집단으로서의 소외감, 경제적 낙후, 일부 극단분자의 사주등으로 92.12월의 아요디아 사태에서 보듯이 항상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부패와 비능률

사회 지도층의 부패와 사회 전체에 만연한 비능률은 인도 국내정치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점이다.

소수민족

독립이후의 지도자들은 비대한 연방국가에서 생길 수 있는 소수 민족문제 내지 지역주의 감정을 제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 왔으나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펀잡지방에서의 시크 문제와 아쌈을 포함한 동북지방에서의 Mizo족 및 Naga족 등 소수민족문제는 지역주의 감정과 함께 인도 국내정치의 난제이다.

 

. 헌 법

1950. 1. 26. 공포된 인도헌법은 22395조 및 부칙 9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특징으로는, 정부형태는 내각 책임제 공화국 표방하고, 종교 무차별주의로서 신앙의 자유 허용하며, 주정책의 지시지침(Directive Principle of State Policy)을 통해, 부의 공정하고 적절한 분배 및 생산수단의 집중방지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형태

인도는 의회 민주주의 체제하의 연방국가로서 의원내각제의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다. 연방은 25개주(state)7개 연방직할지(Union Territory)로 구성되어 있다.

연방 행정부

행정부의 구성 : 행정부는 대통령, 부통령, 수상 및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s)로 구성되어 있다.

- 대통령 : 대통령은 5년의 임기로 상.하 양원 및 주의회 의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하여 선출되며 상징적 기능만을 행함(군 최고 통수권 보유)

- 부통령 : .하 양원 의원만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하여 선출되며 상원의장을 겸함.

- 수상 : 하원의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 지도자를 대통령이 임명하며 연방정부의 실권을 행사함.

-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s) : 연방각료(Cabinet Minister) 및 국무장관(Minister of State), 부장관(Deputy Minister)으로 구성되며 각료회의는 하원에 대하여 연대책임 지며, 수상이 의장임.

입법부

- 상원(Rajya Sabha): 상원은 각주 및 연방직할지 의회에서 선출되는 233명 및 대통령이 임명하는 12, 245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6년으로서 매 2년마다 1/3씩 개선됨. 예산 관계법안을 제외하고는 하원과 동일한 권한을 갖고 있기는 하나, 상원의원들이 간접선거에 의해 선출됨으로써 각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선출되기보다는 각주 정당세력에 따라 선출되는 것이므로 진정한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도 있다.

- 하원(Lok Sabha): 하원은 각주 및 연방직할지 대표와 대통령이 임명하는 Anglo-Indian community 대표 2명등 545명으로 구성하며, 임기는 5년임. 각주의 의석은 1971년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한 인구분포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배분됨.

사법부

연방 대법원(Supreme Court of India), 주 최고법원(High Court), 지방법원(Lower Court)으로 구성되는 3심제임. 대법원은 인도 헌법과 법률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권을 가지며 대법원의 판결은 모든 법원에 대해 구속력을 가짐. 대법원은 수상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 및 13명 이하의 대법원 판사로 구성되며 고등법원은 각 주별로 설치되어 있다.

주정부

각 주에는 주정부와 주의회가 있다. 주를 대표하는 주지사(Governor)5년의 임기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주행정의 실권은 주지사가 주의회 다수당 지도자 중에서 지명하는 주수상(Chief Minister)이 장악함. 주의회는 주에 따라 단원제 또는 양원제이며 주에 따라 정원을 달리함. 25개주, 6개 연방지역, 1개 수도지역

 

. 인도의 국방

1) 안보환경

인도는 북으로 파키스탄, 중국, 아프가니스탄,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 및 미얀마와 접경하고 있으며, 이들 국가와의 접경선은 무려 15,080Km(파키스탄 3,325Km, 중국 3,439Km, 아프가니스탄 106Km, 네팔 1,751Km, 부탄 662Km, 방글라데시 4,339Km, 미얀마 1,458Km)에 달함. 또한 동쪽의 벵갈만, 서쪽의 아라비아해를 포함한 3면이 인도양으로 둘러싸여 있고 6,000Km의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며, 걸프전을 계기로 군사대국인 인도를 중심으로 한 인도양이 전략적.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부상되고 있다. 3차에 걸쳐 전쟁을 치룬 파키스탄과는 자무. 카시미르주를 둘러싸고 무장 테러군과 인도 보안군 간의 소규모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어 양국간에는 안보 면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중국과는 1962년 전쟁을 통해 인도의 일부지역을 중국이 점령하여 영토 소유권과 국경선을 둘러싼 양국간의 이해관계가 상충되고 있으나, 93. 9월 라오 수상의 방중과 "국경선 평화유지 협정" 체결등 양국관계의 정상화와 안정화를 꾀하는 한편, 국경문제, 군인사 교류 등이 개선되고 있어 외면적 신뢰관계는 증진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군사력을 계속 증강하고 있고, 대규모 핵실험을 계속하고 있어 안보 면에서 가장 큰 위협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2) 군사일반

인도의 군 통수권은 대통령에 있으나, 국가 방위의 1차적 책임은 내각에 있다. 특히 국방장관은 국가 방위와 관련된 문제에 관해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짐. 국방장관은 육, , 공군 사령부를 통해 군 행정권 및 작전권을 행사한다.

주재국은 합참의장제도가 없고, 3군 총장중 먼저 보임된 총장이 자동적으로 총장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합참의장 역할 수행한다.

국방담당 국무장관은 통상 다른 부서 담당 국무위원이 겸직하며, 국방장관 보좌역할 수행한다.

국방차관 예하에는 3개국장(Joint Secretary)1개 차관보(Additional Secretary)가 있고, 차관보 밑에 4개 국장으로 조직, ..공군 및 기획.예산, 시설물, 군수조달, 충원, 면제, 군율, 공사, 복지 업무등을 관장한다.

국방생산 및 조달차관 예하에는 주요 무기방산계획 및 조정국, 표준국, 항공개발 및 생산국, 품질보증국등이 있다.

국방연구개발 차관 예하에는 각종 연구, 분석, 기술개발 기구 및 센터 등이 있다.

 

3) 인도의 각군별 병력현황

 

병 력

98

55

11

사 령 부

6(군단 11)

3개 지역사령부

2개 함대사령부

5개 작전사령부 및

2개 기능사령부

주요장비

주전투전차 - 3,300

경전차 - 100

지대공미사일 - 1,800

견인포/자주포 4,200/180

헬 기 - 200

잠수함 - 19

항공모함 - 1

구축함 - 6척 프리키트함 -13

기뢰함 - 18

수륙양륙함 - 20

초계함 - 25

지원함 및 기타 - 39

 

전투기 - 800여대

훈련기 - 330여대

수송기 - 240여대

비행장 - 68

 

 

 

군사력 종합

세계 4

세계 5

세계 4

 

 

4) 국방비

90년대 들어 인도 북방비의 배정비율은 점차 감소 추세에 있어 전력증강사업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90년대초 국방비는 GNP대비 2.88% 이었으나 점차 감소되어 97-98 회계연도에는 2.20%선을 유지하였다.

 

5) 방위산업

국방성의 국방생산 및 조달국 예하 소속으로 힌두스탄 항공사, BHARAT 전자회사, MAZAGON 선박회사 등 전국에 8개 국영 방산업체가 있고 38개 병기공장을 갖추고 있다. 또한 국방성의 국방 연구개발국에 국방연구개발기구(DRDO: Defence Research & Development Organisation)가 있고 전국에 47개 실험소 및 연구소가 있으며 16,000여명의 과학자를 포함, 34,000명의 연구원을 보유하고 미사일, 항공기를 포함한 각종 신형무기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6) 장교 양성

인도군의 핵심전력인 장교 양성은 3년 과정의 국방사관학교(National Defence Academy)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육..3개군 공동으로 생도교육을 실시하며, 국방사관학교 졸업 후에는 별도의 각군 사관학교에서 1년간의 전문교육을 이수 후 장교로 임관한다. 소령급을 대상으로 장교 전문화 교육을 위한 1년 과정의 국방참모대학(DSSC: Defence Services Staff College)3개군 공동으로 교육을 이수한다. 군 최고의 교육기관으로는 1년 과정의 국방대학원이 있으며 3개군에서 최소 정예의 준장급 장교로만 선발하여 교육시키며 이들이 인도군을 이끌어 갈 핵심 지휘관이 된다.

 

7) 원자력 및 핵개발

'74. 5.18, 인도 서부 라자스탄 주의 Pokhran에서 제 1차 핵실험에 이어 '98. 5.113개 종류의 핵실험을, '98. 5.13에는 2종의 핵실험을 모두 동일 지역에서 실시했다. 인도는 핵무기 생산능력을 확실히 갖추게 되었으며 원자탄, 수소탄 제조용 플르토늄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핵무기는 인도가 이미 자체 개발한 지대지 미사일인 PRITHVI(사정거리 150-250Km)와 개발이 진행중인 1,500-2,500Km의 중거리 탄도 미사일(IRBM)AGNI에 장착하게 되고, AGNI 미사일은 향후 사정거리 5,000Km까지 개발계획임. 항공기로는 MIRAGE-2000, MIG-29 SU-30 전투기에 핵무기를 장착하게 된다. 인도의 핵발전소는 뭄바이의 Taragur, 체나이의 Kalpakkam5개 지역(각지역 2개 원자로)에 위치하며 4개 지역에 추가로 중설 중에 있다. 핵발전소가 추가 건설되어도 인도의 발전량은 수요에 비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4) 우주개발

인도의 우주개발 계획은 1962년부터 시작하였으며, 67년에는 인도가 최초로 개발한 Rohini-75 로켓트 발사를 시작하여 75년 국산 인공위성을 최초 발사한 이후 현재까지 30여회의 인공위성을 발사하였다. 50Kg급의 SLV-3(Satellite Launch Vehicle)을 시작으로 150Kg급의 ASLV(Augmented Satellite Launch Vehicle)을 거쳐 1,000Kg급의 PSLV(Polar SLV) 발사를 모두 완료하였고 2,500KgGSLV(Geosynchronous SLV) 발사 계획이 임박해 있다. 인도의 우주개발은 매우 발전되어 있으며 각종 위성 발사체 부품의 외국수출이 점증하여 위성의 수출 상품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4. 인도의 경제와 산업

 

. 주요 경제지표

 

1993/94

1994/95

1995/96

1996/97

97/98

경상 GDP

억불

2,305

2,720

3,284

3,539

3,944

GDP 실질성장율

%

5.0

6.3

7.0

7.0

5.1

인 구

백만명

889

906

923

930

955

1인당 GDP

259

300

336

380

414

수 입

백만불

23,306

28,654

36,370

38,635

40,779

수 출

백만불

22,238

26,330

31,830

33,180

33,980

무역 수지

백만불

1,068

2,324

4,540

5,455

6,799

경상 수지

백만불

315

2,624

5,085

6,600

5,949

외환보유고

백만불

15,068

20,809

17,044

21,700

25,900

대외 부채

백만불

91,074

95,201

97,900

92,900

92,900

대외부채상환율

%

25.2

26.6

26.4

26.0

*24.1

재정 세입

백만불

40,971

50,885

52,438

55,924

58,811

재정 세출

백만불

60,179

69,262

69,668

73,503

80,397

재정 적자

백만불

19,208

18,377

17,230

17,579

21,586

소비자물가상승율

%

9.9

9.7

8.9

7.0

8.0

산업생산증가율

%

6.0

9.3

12.4

4.5

6.0

환 율

Rs/

31.37

31.40

33.45

35.42

*42.5

 

자료 : ECONOMIC SURVEY, THE MINISTRY OF FINANCE OF INDIA, FOREIN TRADE STSTIC

* 98. 12월 현재 기준 * 회계연도 '97/'98'97.4.1-'98.3.31간임.

. 대 주요국별 수출.

 

 

수 출

수 입

무 역 수 지

증 감 율(%)

96/97

97/98

96/97

97/98

96/97

97/98

수출

수입

미 국

6,563

6,638

3,690

3,639

2,873

2,999

1.1

-1.4

영 국

2,049

2,041

2,137

2,343

- 88

-301

-0.4

-9.6

독 일

1,895

1,857

2,834

2,504

- 939

-647

-2.0

-11.7

일 본

2,008

1,861

2,190

2,131

- 182

-271

-7.3

-2.7

벨기에

1,094

1,193

2,254

2,445

-1,160

-1,252

9.0

8.4

UAE

1,478

1,597

1,738

1,748

- 260

-151

8.1

0.6

사우디

578

676

2,773

2,531

-2,195

-1,855

17.0

-8.7

홍 콩

1,865

1,922

320

294

1,545

1,628

3.1

-8.1

이태리

935

1,100

989

921

- 54

179

17.6

-6.9

싱가폴

979

740

1,065

1,189

- 86

-450

-24.4

11.7

호 주

386

426

1,319

1,498

- 933

-1,072

10.4

13.6

중 국

616

682

758

1,160

- 142

-478

10.8

53.0

말 련

532

482

1,043

1,187

- 511

705

9.4

13.8

러시아

812

891

629

680

183

210

9.7

8.1

프랑스

717

741

769

788

- 52

-47

3.3

2.4

한 국

519

412

885

898

-366

-485

-20.6

1.5

 

. 경기동향 및 '99 전망

1) 개 관

최근 2, 3년간 국내 정국의 불안정, 농업생산 감소 및 수출 부진으로 경 제 성장세가 위축되어 경제는 정체 상태 지속하고 있으며, 특히, 최근의 인.파키스탄 분쟁 지속과 현 과도내각의 정치적 취약성 및 10월을 전후한 총선실시 등으로 인도 국내의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어 경제활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핵실험 관련 미.일등의 경제 제재 해제 움직임과 유로체제 출범, 아시아 경제위기 진정 국면등 대외 경제 환경이 개선되고, 인도정부의 경기 부양 노력과 개혁개방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될 경우, 인도 경제는 금년 에 다소 회복될 전망(전문가들은 약 5.5% 내외 성장 전망)이다.

2) '99 분야별 전망

경제성장률: '98/'99년도에 인도 정부는 6-7%GDP 성장과 20%의 수출 증가를 목표로 하고 있으나, 산업계와 경제 전문가들은 GDP5.5% 내외, 수출은 10%미만에서 증가될 것으로 전망된다.

산업생산 증가율은 국내 물가상승, 정치불안정 등으로 투자심리가 위축되어 전년수준(6.6%)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GDP의 약 30%를 차지하는 농업생산이 전년도의 마이너스 성장 에서 '98/'99년도에는 최소 2%정도 증가될 것으로 예상되어 경제 성장세 회복에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수출입

인도의 수출입은 국내 산업생산의 부진 및 아시아 경제위기 등으로 위축되고 있으나, 농산물 생산의 호조 반전, 핵실험 관련 경제제재 해제 움직임, 유로체제 출범 및 아시아 경제위기 진정 국면등 대외 경제 여건의 개선 등으로 향후 점차 나아져 수출입은 각각 5% 내외의 증가율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환 율

루피화는 '97년말부터 국내정국 불안, 핵실험 및 인.파키스탄 분쟁 등으 로 '99.6월말 현재 43.2루피로 전년대비 약 8% 하락하였다. 루피화는 인도 정부의 루피화 고평가 정책, 상대적으로 넉넉한 외환보유 고('99.6월말 현재 320억불)등으로 외환 수급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 문에 향후 42-44루피 대에서 안정될 것으로 전망되며, 한편, 루피화는 상기 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중국등) 주요국 통화의 움직임, 세계 경제의 회복 속도 및 주재국 정치불안정에 기인한 외국투자 감 소등 대외적인 여건의 변동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5. 인도의 언론

 

. 개관

인도의 언론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1947)을 쟁취하는데 공헌한바 크고, 독립이후에는 국가발전 건설과 함께 결합하여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높은 긍지를 갖고 있다. 특히, 62년 인.중 국경분쟁, 65년 및 7년 인.파 전쟁시에는 국가적 결속과 국민사기 진작을 위해 공헌한바가 컸고, 98년 핵실험 시에는 미국등 서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높은 국민적 지지를 얻었는데 이에 언론의 역할이 지대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75-76년 비상조치 당시 언론검열 실시와 4개 통신을 1개 통신으로 통합하여 국영화 하는 등의 일시적인 언론 탄압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거의 완전한 언론 자유를 누려오고 있다. 따라서 개도국 중 가장 수준 높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으며 여론정치 구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 신문. 통신

1) 신 문

 

신 문 명

발간주기

부수

독자층

배포지역

비고

Ananda Bazaar patrika

일간(벵갈)

40만부

일반인

켈커타등 동북부

 

Asian Age

일간(영어)

13만부

뉴델리,뭄바이,캘커타,벵가로르

 

Business Standard

일간(영어)

6.5만부

뉴델리등 대도시

 

Dainik Jagran

일간(힌디)

60만부

수도권 및 UP

 

Deccan Herald

일간(영어)

13만부

인도 남부지역

 

Economic Times

일간(영어)

9만부

경제인,지식인

인도전역

유력 경제지

Eenadu

일간(텔루구)

40만부

일반인

AP주 및 인도중부

 

Financial Express

일간(영어)

7만부

경제인

뉴델리등 대도시

 

Frontline

격주간(영어)

15만부

식자층

인도 전역

 

Hindustan Times

일간(영어)

50만부

대도시 및 중북부

중북부 최대 유력지

India Today

격주간(영어)

31.5만부

인도 전역

 

Indian Express

일간(영어)

80만부

인도 전역

 

Malayala Manorama

일간(말라야람)

60.7만부

일반인

케랄라 지역

 

National Herald

일간(영어)

7.5만부

국민회의당원

인도 전역

 

Navbarat Times

일간(힌디)

9.5만부

중산층

인도 중북부

힌디 유력지

Observer of Business and Politics

일간(영어)

8만부

식자층

뉴델리 및 뭄바이

 

Pioner

일간(영어)

15만부

청년층

UP, 뉴델리 일원

 

Punjab Kesari

일간(힌디)

17만부

농민,청년층

인도 북부

 

The Hindu

일간(영어)

50만부

식자층

인도 전역

남부 유력지

The Statesman

일간(영어)

25만부

식자층,공무원

인도 전역

 

Times of India

일간(영어)

100만부

식자층

인도 전역

인도전역 최대 유력지

 

 

2) 통신사

 

통신사명

사용언어

타전지역

보도성향

계약사

비고

PTI(Press Trust of India)

영어힌디어

인도 전역

중 도

UPI, Reuters, AFP, Kyodo, OANA

인도 최대 통신사

UNI(United News of India)

영어힌디어

인도 Gulf 지역

중 도

AP, TASS

 

 

 

. 방송

국영 TVDoordarshan(DD-TV)DD1, DD2, 해외방송 등의 채널을 위성으로 방송하고 있다. 이중 DD1은 전국에 방송하고 있으며 각 지방에서는 해당 지방 언어와 힌디 및 영어 방송을 교대로 하고 있다. DD2는 대도시지역 중심으로 오락위주의 방송을 하고 해외채널은 중동, 동남아, 영국 거주 인도 교민을 상대로 문화 프로그램 위주로 방송하고 있다. 국영 라디오인 AIR(All India Radio)은 현재 124개의 방송망을 갖고 있으며, 전 인구의 95.7%, 전면적의 85% 지역에 방송하고 있다. 신문 등 인쇄매체 정기간행물(8,000)은 거의 대부분 개인소유로 운영되고 있으나, 라디오 및 TV는 국영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TV 및 라디오는 방대한 지역과 인구의 2/3 이상이 문맹이라는 특수성으로 인쇄 보도.교육.오락 등 일반적인 방송기능과 정부의 대국민 홍보기능 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나, 95년이후 CNN, BBC, STAR-TV등 위성채널의 인도지역 침투로 인해 국영방송이 시청율 면에서 많은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임. 이에 정부에서는 국영방송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공사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관련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심의중이나, 공산당등 이에 반대하는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아 언제 법안이 통과될지는 미지수임. 또 자체수익금 확보를 위해 FM 채널 중 델리. 뭄바이 지역에 방송하는 채널일부를 민간기업에 할애해 왔으나, 98.7, 임차료가 너무 싸다는 의회의 반발에 따라, 현재 민간임차 채널은 잠시 중단된 상태인바, 곧 적정가격 인상으로 재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타 세계 유수의 위성방송이 유선방송과 연결되어 인도 전역에 방송되고 있으며, 한달 수신료는 대략 25불 수준이다.(99.3월기준)

 

6. 인도의 외교정책

 

. 대외정책의 기조

오늘날의 인도 외교정책은 네루 외교노선의 연장이라 할 수 있으며 지난 40여년간 인도의 외교정책을 지배해 온 기본적 특징은 비동맹주의와 균형주의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외교기조는 인도가 처한 특수한 외교, 안보환경에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비대한 국토와 복잡한 사회적 구조는 국가 단결을 독립초기의 최대의 관심사로 만들었으며, 따라서 대외정책 선택에 있어서 어느 한쪽을 편중하는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내부적인 제약요건이 있었다. 또한 인도 대륙 내 여타 국가의 정세변동은 인도의 안정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인도는 강대국세력의 인도 대륙 침투를 적극 저지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곧 균형주의와 비동맹주의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1) 비동맹주의: 인도는 독립 당시부터 패권주의 반대, 군사동맹가담 반대,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및 모든 국가와의 우호 관계수립 등 비동맹회의가 채택한 것과 유사한 기본이념을 대외정책의 기본노선으로 표방하였다. 이러한 기본입장에 따라 인도는 비동맹운동의 창설을 주도하여 왔고, 비동맹회의 창설 이후에는 비동맹주의를 대외 정책의 기조로 삼아 왔다. 그 이유는 미,소 양진영 중 어느 한쪽을 택할 경우 이는 인도의 독자적 행동을 제약하고, 나아가 인도 대륙에서의 현상 유지에 어려움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2) 균형주의: 정치적으로 서구식 의회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구상하고 있던 네루 수상은 동, 서양 진영간 적절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최대의 실리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균형주의는 비단 대미, 대소 관계뿐 아니라 대비동맹관계, 대아랍관계, 대서구 관계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인도는 비동맹회의 창시국의 하나이며, 비동맹의 주도국으로서 국제정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인도는 인디라 간디여사 정권 하에서 소련의 경제.군사 원조를 배경으로 친소적 경향을 보였으나, 현 정부는 외채위기 등 경제문제로 인하여 미.일 등에 기울어진 친서방적 대외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인접국가와의 우호관계 증진은 인도 대외정책 기조의 하나로서 이들과의 협력, 관계증진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파키스탄과의 국경분쟁, 방글라데시와의 갠지스강 용수문제, 스리랑카 주거 인도인의 지위 문제 등으로 이들 국가와의 관계는 가끔 긴장상태를 보이고 있다. 라오 전정부가 등장한 '917월 이후 인도는 친서방 정책을 통한 외채위기 등 경제문제 해결에 주력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과 이미 수교하였고, 최근 남아공화국과 관계개선을 추진중이다.

 

. 인도의 인접국가와의 관계

 

1) 인도-파키스탄 관계

독립과정에서의 파키스탄의 분리독립, 3차례에 걸친 전쟁, 현안문제로서의 카시미르 문제는 1971넌 휴전당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관계 정상화 및 협력증진을 유지한다는 Simla 협정(1972)을 체결하는 등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였고, 파키스탄-미국 관계가 소원해짐에 따라 미국의 대 파키스탄 무기제공도 감소되어 인도-파키스탄 관계는 큰 마찰없이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1979년 아프간 사태에 다른 미국의 대 파키스탄 무기제공 문제로 인도.파키스탄 관계가 다시 알력관계를 보였다. 인도가 미국의 대 파키스탄 무기제공은 인디아 지역에 초강대국 간의 경쟁을 초래하고, 인도.파키스탄 간의 군사균형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내세우자, 파키스탄은 부전조약 체결을 주장하였는 바, 19821월 양국 외무장관간에 동 조약 체결문제 협의를 위한 회담이 있었을 때 인도측은 평화 우호협력 조약 체결과 인도.파키스탄 합동 위원회 설치를 제의하였다. 특히 1984. 6. 황금사원에 대한 군대진입 이후, 펀잡사태에 관련된 시크 분리주의자들이 파키스탄내에서 훈련을 받는 등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았다고 인도 정부가 비난함으로써, 양국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으며, 1984. 4. 인도 항공기를 납치한 시크 극렬분자들에 대하여 파키스탄 관리가 Lahore 공황에서 무기를 주었다는 사건과 1984년말 파키스탄내 시크지역에서 인도 순례자들이 해외거주 시크교도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양국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986. 12 198. 2 양차에 걸친 양국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양국간 관계개선에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1987년 초부터 실시된 인도의 대규모 군사훈련(Brasstacks 훈련) 및 이에 대한 파측의 군사적 대응, 1987넌 중반이래 수차에 걸친 파키스탄군의 인도 Siachen 빙하지역 공격이 긴장상태의 직접적 원이 되고 있으며, 파키스탄 측의 핵무기 개발 움직임, 미국의 대 파키스탄 AWACS 임대 및 첨단무기 제공, 1987년 말 미국의 대 파키스탄 6개년 원조(40억불) 승인등은 인도국민에게 커다란 불안감을 야기 시켜, 상호 누적되고 있는 불신감 속에서 양국간 이미 합의한 협의 창구 활용이나 협력기획조차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90. 1. 인도관할 카시미르 지역 내 회교도들이 인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 이를 진압하려는 인도 보안군과의 유혈충돌로 수백 명이 사망하였고, 인도는 이 소요사태가 파키스탄측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위자 현장 사살 명령하달(1990. 1), 대규모 병력의 국경이동 배치(1990. 2) 및 국경봉쇄(1990. 5) 등 강경대응함으로 인도.파키스탄간 군사긴장이 고조된 바 있다. 이후 인도.파키스탄 양국은 정상회담(1990. 11, 몰디브 개최 SAARC 정상회담), 외상회담(1990. 4, 뉴욕), 6차에 걸친 외무차관회담 등을 통해 긴장 해소 노력을 경주함. 그 결과, 4차 외무차관 회담시(1991. 4) 상호 영공 불가침 및 군사훈련 사전통보 협정에 서명하고, 6차 외무차관 회담시(1992. 8)에는 화학무기의 개발, 생산, 배치 및 사용을 금지하는 공동성명에 서명하는 등 일련의 성과를 거두었다. 6차 인도.파키스탄 외무차관 회담이후, 1992.10. 파키스탄인 인도내 피살사건(Zia Habibullah 사건) 발생, 1992. 11. 인도.파키스탄 양국간 Siachen 빙하지역 철군문제를 협의하는 국방차관회담(6) 결렬, 1992.12 Babir 회교사원 파괴, 1993. 3, 봄베이 연속 테러사건등으로 인도.파키스탄 관계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1993. 9 무장그룹에 의한 카시미르 지역내 하즈라트발 회교사원 점거사태의 평화적 해결, 1993. 10, 파키스탄의 유엔에서의 카시미르 관련 인권문제 상정철회 및 파키스탄 신정부 수립이후 대화재개 원칙 표방에 따라 대화재개 분위기 조성, 1994. 1, 7차 인도.파키스탄 외무차관 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제7차 회담에서 파키스탄측은 카시미르 문제의 해결이 대화 계속의 전제라는 점을 주장하였고, 인도측은 인도의 영토보존과 직결되는 문제에서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 카시미르 문제에 대한 양측의 근본적 차이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회담은 인도.파키스탄 관계개선 계기를 마련치 못하였다. .파 외무차관회담은 1994.1 개최된 이후 3년여만인 1997.3.28-30 뉴델리에서 개최되었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1997.5.12 몰디브 개최 제9SAARC 정상회담 계기에 인도의 Gujral 수상과 파키스탄의 Sharif 수상이 정상회담을 갖고, 차기 외무차관회담 일정(97.6 이슬라마바드)에 관하여 합의하였고, 1997.6.19-23 이슬라마바드에서 개최된 인.파 외무차관회담에서 인.파간의 현안을 다음 8개 의제로 정리하고 실무그룹을 구성, 협의키로 합의하였으며, 그 의제는 아래와 같다.

평화,안보 및 신뢰구축 조치

자무.카시미르(Jammu & Kashmir)

Siachen 빙하지역 경계선 획정 문제

툴불 지역 해운 프로젝트(Tulbul Navigation Project)

Gujarat주의 Sir Creek강 경계획정 문제

테러리즘 및 마약 거래 문제

경제통상 협력

인적 교류 증진

1997.9.15-18 뉴델리에서 개최된 인.파 외무차관회담에서 인도측이 자무.카시미르 의제에 관한 별도의 실무그룹 구성을 거부함으로써 동 회담은 별 성과없이 종료되었고, 1998.7.29 콜롬보 개최 제10SAARC 정상회담 계기에 인도의 바즈파이 수상과 파키스탄의 샤리프 수상이 정상회담을 가졌으나, 자무.카시미르에 관한 별도 실무그룹 구성 문제에 관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였으며, 1998.9.23 유엔총회 참석 계기에 바즈파이 수상과 샤리프 수상은 정상회담을 가진 바, 양측은 평화, 안전 및 신뢰구축 조치와 자무.카시미르 등 2개 의제에 관해서는 10월 이슬라마바드 개최 외무차관 회담에서 다루기로 하고 나머지 6개 의제에 관해서는 11월 뉴델리 개최 의제별 실무그룹회의에서 다루기로 합의하였다. 1998.10.16-18 이슬라마바드 개최 인.파 외무차관회담에서 인도측은 카시미르 통제선(LoC)의 현상 변경은 양자간 대화를 통하여 해결한다는 Shimla협정(1972)에 따른 카시미르 문제 해결을 주장한 반면에, 파키스탄은 인.파 양국군의 카시미르 철수 및 주민투표 실시를 권고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1949)에 따른 해결을 주장하였는바, 요컨대, 인도측은 카시미르 통제선의 현상 유지를 희망하며, 파측은 카시미르 통제선의 현상 변경을 희망하는 바, 이를 위하여 파측은 제 3자 중재개입을 주장하나 인도는 제 3차 개입을 반대하였다.

1998.11.5-13 뉴델리에서 개최된 6개 의제별 실무그룹회의에서 양측은 어부 및 선원 석방, 뉴델리-라호르간 버스 운행, 파키스탄의 잉여 전력의 대인도 수출, 사증제도 완화등에 관하여 합의하였으나 그밖에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고, 1999.5.25 LoC를 월경, 캐시미르의 Kargil지역에 침입한 파키스탄 침투군 축출을 위하여 인도공군의 공습 개시하였다.

 

2) 인도-방글라데시 관계

인도는 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치루게 될 정도로 방글라데시의 독립에 깊이 관여하였고, 방글라데시가 소련보다는 미국 및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무슬림이 우세한 국가임에 비추어 방글라데시와의 우호관계 유지를 중요시하여 왔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의 국내정세 변동, 방글라데시 국민의 동국주재 인도인에 대한 도발적 행동, 방글라데시와의 인도 국경지역인 New Moore Island에 대한 영유권 문제, Farakka 댐을 통한 수자원 공동이용 문제 등으로 양국간에 마찰이 있으나, 인도는 최대한 문제를 무마시키면서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보여왔으며 또한 방글라데시에 매년 상당액의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New Moore Island 는 벵갈리 간지스강 하구 해안에 위치한 12정도의 토사 축적으로 생긴 도서인 바, 동 도서가 1974년 발견된 이래 인도측은 영유권을 주장해 왔고, 방글라데시측은 1979넌 처음으로 영유권을 주장한 후 수차 이를 주장해 왔으며, 1977년 간지스강 공동이용을 위한 협정(Farakka 협정)을 체결했는 바, 동 협정이 1982. 11월 만료되어 이의 갱신을 위한 양국회담이 수차 개최되어 왔으나, 방글라데시측은 네팔지역에 댐을 건설, 수자원량을 증대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고, 인도측은 네팔을 관여시키지 않고 운하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양국이 현안문제를 타결하지 못하여 오던 가운데, Ershad 방글라데시 대통령이 1982. 10. 인도 방문을 통하여, 양측은 Farakka 협정 연장문제, New Moore 섬 문제, 해안국경선 확정문제의 해결방안에 대하여 합의하였으며 또한 양국은 합동경제위원회를 설치하였고, 1984년중 양국은 국경지역에서의 철조망설치 문제 때문에 방글라데시측이 두 번이나 인도측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또한 1984. 4에 양국 국경지역 군병력간에 총격전이 발생하여 긴장상태를 나타냈으나, 1998.12 인도.방글라데시 양국은 철조망 설치문제에 관하여 기본적인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3) 인도-스리랑카 관계

스리랑카 북쪽에는 인도 남부지방인 타밀과 종교적 및 문화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약 250만명의 타밀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스리랑카 국민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Sinhalese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타밀인 국가의 수립을 주장하고 있는 바, 동 타밀문제 해결을 둘러싸고 양국간에 긴장이 계속되어 왔다. 이와같이 스리랑카 타밀 소수민족의 분리주의 운동을 둘러싸고 스리랑카와의 관계가 악화되던 중 1987. 5. 스리랑카 정부의 타밀 게릴라 밀집지역인 Jaffna에 대한 대규모 공세로 다수의 타밀인 사상자가 발생하자 인도정부가 1987. 6. 4. 식량, 의약품을 Jaffna에 투하하는 공수작전을 전개, 양국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양국정부는 외교적 공방전 끝에 6.15 인도 구호품의 전달방식에 합의, 구호품 전달이 실현되었고, 이어 인종분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적극적 외교 교섭이 전개되었다. 동 교섭 결과 1987. 7. 인도.스리랑카간 평화협정이 극적으로 체결되어 인종 분규 해결과 평화회복의 계기가 마련되었고, 동 협정은 스리랑카의 주권 및 독립보전하 동.북부 타밀 주거지역에 대해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대신, 게릴라의 무기반납을 통한 테러행위 금지를 골자로 하고 있으며, 인도가 Guarantor로서의 역할을 수행키 위해 인도군을 스리랑카에 파견, 스리랑카 정부군과 함께 타밀 게릴라 무장해제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게릴라의 완강한 반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었다.

그러나 인도정부는 타밀 게릴라 무장해제를 완수키 위해 계속 노력하는 한편, 각종 타밀단체들과 막후 협상을 병행, 게릴라의 무기 반납, 전후 복구사업, 자치권 내용등에 관하여 교섭하였고, 1989. 1, 취임한 "프레마다사" 스리랑카 대통령은 1989. 11, 좌익 반정부 단체(JVP) 진압, 1990. 3. 인도평화유지군(IPKF)의 철수 실현에 성공한데 이어 종래의 대화 자세에서 군사적 진압방침으로 선회, 동북부지역을 거의 평정하였다. 1990. 6. 타밀족 분리독립단체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가 정부측과의 휴전합의를 파기, 군기지를 공격함으로써 내전이 재발됨. 타밀족 난민이 인도남부 타밀나두주로 대규모 유입되는 사태가 발생, 타밀족 난민의 조기귀환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었으나 1992. 1, 양국 외상회담에서 타밀난민의 본국 송환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IPKF 철수촉진을 위한 LTTE에 대한 스리랑카 정부의 무기 제공설, 인도 라디오 방송 특파원 추방 등으로 양국관계가 악화, 1991. 11. 스리랑카에서 개최키로 한 제 6SAARC 정상회담이 인도측의 비협조로 연기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1998.12. 스리랑카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하여 우호를 다짐으로써 양국 관계의 확대발전 전망은 순조로운 편이다.

 

4) 인도-네팔 관계

인도는 네팔이 인접국일뿐 아니라 중국과의 사이에 위치하고 중국과 친밀한 관계에 있어, 네팔과의 우호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네팔은 1962년 인-중 전쟁이후 양 강대국간 대립관계를 이용, 등거리 외교정책을 폄으로써 인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데서 탈피, 독자노선 관철을 시도하였다. 인도는 최근 수년간 네팔이 지나치게 친중국 접근을 시도하자 1989.3. .네팔간 통상 , 통과협정 종료를 선언, 네팔의 대외교역 통로 15개중 13개를 폐쇄, 경제압력조치를 취하였고, 이어 89. 7월에는 캘커타 유류 하역항 폐쇄 조치로 네팔내 유류파동을 초래, 경제난이 극심하였다. 동 사태로 양국간 긴장관계가 지속되던 중 90. 6월 바타라이 네팔수상의 인도방문 및 90. 8월 싱수상의 네팔방문을 계기로 협상이 진전, 어느 정도 정상화를 이루었으며 인도의 바즈파이 내각의 SAARC 회원국과의 관계증진 정책에 따라 양국관계 전망은 밝은 편이다.

 

5) 인도-부탄

부탄은 1949. 8. 인도와 체결한 우호조약을 기반으로 하여, 인도와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인도 정부의 권고에 따르도록 되어 있음), 그 결과 부탄은 종래 인도 이외의 나라들과 개별적인 외교관계 없이 모두 인도를 통해서 그 대외관계를 처리하여 왔다. 부탄 국왕은 1년에 1회 이상 인도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양국관계 문제를 협의하는 등 양국간 긴밀한 유대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6) 인도-미국 관계

미국의 인도 독립 지원 및 양국의 정치체제 유사성으로 인하여 독립직후에는 상호 의존관계에 있었으나, 대외정책의 차이로 대체로 원활치 않은 상태를 유지해 왔다. 1) 인도의 군사 블럭 불가담 원칙, 인도의 중국 승인, 미국의 대베트남 정책에 대한 인도의 비난, 2) -파 전쟁시 미국의 파키스탄 지지, 미국의 대파키스탄 무기제공 등이 양국간의 마찰요소로 작용하여 왔다. 1987.10. "간디" 수상이 방미, 주요 국제문제에 대한 양국간의 기본 입장의 차이로 야기되었던 소원한 관계를 어느정도 좁히고, 첨단 방산기술 도입 등 제반 실질협력 증진 노력에 합의함에 따라 양국관계는 정상화를 향해 일보 전진하였으며, 냉전 종식이후, 인도는 경제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면서 미국.서구 및 러시아와의 전면적 관계 재조정을 꾀함에 따라 종래의 미..파와 소.인의 대결구도가 퇴색하면서, 미국의 대인도.파키스탄간의 균형유지를 기조로 인도.미국간 경제 및 과학기술 협력관계를 통한 실질적 협력관계가 크게 증진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덕으로 추진하는 핵비확산문제(NPT) 및 지역분쟁 억제의 일환으로써 서남아지역 핵 및 미사일 확산방지 문제에 있어 인도는 미국과 뚜렷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인도는 핵보유국을 포함하는 범세계적 핵비확산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NPT CTBT에 동조할 수 없다는 입장이며, 또한 현실적으로 파키스탄, 중국으로부터 핵위협이 존재하는 한 핵 옵션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더하여 핵무기 보유문제에서 불투명한 입장을 취하는 파키스탄에 대해 F16기의 판매를 보류한 Pressler 법안을 수정하는 Brown 수정안이 1995.10. 미 의회에서 통과됨에 따라, 인도는 미.파키스탄 군사협력 관계의 부활 가능성 및 그 결과로서 서남아 지역의 안보정세 변화에 극히 민감한 의구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양국은 1994. 5. "라오" 인도수상의 방미 결과, 양국간 경제.통상 협력관계 강화를 재확인 했으며, 1995. 1. Perry al 국방장관이 인도 방문시에 서명된 "방위관계에 관한 합의 의사록"에서 양국 정부 및 민간차원의 국방 및 방산분야 협력을 다짐, 양국간 최대관심사인 경제협력 및 군사문제에서 광범위한 협력관계를 구축해 놓음으로써, 향후 양국간 개별사안에서의 이해를 조정하여 포괄적 관계 발전의 가능성이 예상되고 있다.

 

7) 인도-러시아(소련) 관계

소련은 인도 독립 직후 인도를 친서방적으로 생각하였으나 인도의 중국 승인, 미국 군사동맹 불가담, 수에즈운하 분쟁시 영국 및 프랑스 비난 등의 태도를 취하자 인도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어 Goa 문제 및 인도-중국 전쟁에 있어 인도를 지지하였고, 1962년 미그기의 인도내 제작에 협조한 바 있다. 또한 65년 인-파 전쟁시 종전을 위한 중재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이와같이 양국간 우호관계가 증진되는 가운데 1971년 평화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971년 제3차 인-파 전쟁시 미국이 벵갈만에 잠수함을 파견하는 등 인도에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자 소련은 인도를 지원하는 태도를 취했는 바 이는 인-소 관계의 긴밀화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소 관계의 긴밀화는 이와 같이 인-파관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태도에 크게 연유하는 바, 인도는 자신이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을 때 소련만이 지원을 제공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인-소 관계는 소연방의 붕괴와 인도의 국내경제 악화 등으로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92. 1월 정부대표단을 러시아에 파견, 구소련과의 우호협력조약 승계문제 및 경제협력 강화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CIS내 중앙 아시아 5개 회교국들과 관계강화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러시아와는 인도 무기의 70%정도가 구소련제임에 따라 무기부품 조달 등 군사협력에 계속 우선순위를 두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8) 인도-중국 관계

중국과의 관계는 인도 대외정책의 주요 결정요인의 하나임. 인도는 공산정권 수립시 이를 승인하였고, 중국의 티벳 합병을 묵인하였으며, 반둥 회의에서 함께 주도적 역할을 하는 등 초기에는 양국관계가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56-57년 서티벳과 중국본토 연결을 위해 캐시미르 지역의 인도 영토인 Aksai Chin 지역을 통과하는 도로를 건설한데 이어 Ladaka를 침공하는 문제로 1962년 중-인 전쟁이 발발함. 중인전쟁시 중국이 점령한 Aksai Chin 지역은 Arunchal주 지역의 국경선 확정문제와 함께 국경문제로 남아있다. -중 전쟁으로 양국외교관계는 76년까지 단절되어 왔는 바 제2차 및 제3차 인-파 전쟁시 중국이 파키스탄을 지원하고 파-중관계가 강화되어감에 따라 인-중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후 양국간 관계 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92. 12월 중국수상으로서는 31년만에 이붕 총리가 인도를 방문, 국경문제의 조속한 해결노력 강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함. 오랜 현안인 국경문제에 대한 조속한 합의는 어려울 것이나, 교역 및 경제협력 등 양국간 실질관계를 강화하면서 주요지역문제에 대해서도 정치적 이해의 폭을 점차 확대하는 방향으로 양국관계가 진전될 것으로 예상되며, 현재 양국은 캐시미르 문제와 티벳 문제에 관해 상호 민감한 입장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9) 최근 인도 대외정책의 중점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대외정책 기조의 수정 노력: 구소련 붕괴 이후 CIS 구성 국가와의 관계 재정립 교섭, 특히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 및 지리적, 역사적으로 인접한 중앙아 5개 공화국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친소 특수관계의 약화에 따라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증대된 대미 관계의 강화 도모(미국으로서는 핵문제가 최대 관심사)하고 있다. 국제 무대에서의 지도력 유지 노력하고 있으며, 유엔 안보리 개편 문제, 비동맹의 진로조정 문제 등에 주도적 대처하고자 한다.

인도 경제의 활력 회복을 위한 실질 외교 강화 노력: 동구권 변화 이후 대서방 실질 협력관계의 강화 및 세계 경제의 블록화 추세등에 대비한 아시아 국가와의 협력관계 강화 도모하고, 정부 고위인사의 서방국가 방문 외교 증대 추세이다.

향후 대외관계 전망: 대외관계에서의 실리 우선주의 경향 강화 및 이에 따라 종전의 동구권에 기운 중립노선에서 탈피, 점차 친서방 노선으로 전환 예상된다.

최종점검 : 1999.7.14 (주 한국대사관)/ 점검자 : 김정근(개관,전반적특징,역사,정치,대외관계), 이종관(군사),최연호,김창룡(경제/산업),강배형(언론,문화,종교)

. 인도의 기독교 선교

 

1. 인도선교의 역사

 

. 도마의 선교

인도의 남동부 거점 도시인 마드라에는 도마의 선교를 기념하는 유적지들이 있다. 도마의 무덤이 있는 성도마교회, 도마가 기도했던 동굴, 도마가 잡혔던 언덕 등이다. 도마의 인도 선교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도마의 인도 선교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다. 이장식 교수에 의하면 사도 도마가 인도에 선교하러 왔다면 그것은 약 A.D. 50년 경일 것이라고 하며, 그의 선교 여행은 애굽 알렌산드리아에서 나일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서 육로를 통하여 홍해안에 도착, 배을 타고 파사만을 향해해서 인도 서해안에 상륙했거나, 아니면 시리아에서 동남으로 향하여 인도의 남북쪽 인더스 강 유역에 도착해서 선교하다가 남하했을 것이라고 한다. 이를 전설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은 Sapor II 세의 박해를 피하여 345년경에 CanaThomas가 선발대가 되어 Malabar 지역을 답사했을 때 거기에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그리고 그가 사제단과 교인들을 데리고 Malabar에 왔을 때 기존 그리스도인들의 환영과 안내를 받았으므로, 345년 이전에 인도에는 누군가가 이미 선교하여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한다.

1세기 당시 인도 남서부 코친에는 유대인 정착촌이 해안선을 따라 흩어져 있었고 이 곳에 온 도마는 처음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했다고 한다. 그는 남서 해안에 7개의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그 후 동남 해안인 마일라뿌르(현재 마드라스)로 옮겨 복음을 증거하다가 A.D. 72년 브라민들에 의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인도의 기독교 인구 분포를 보면 도마가 선교했다고 전해지는 이들 지역에 기독교인들의 인구 비율이 높다.

 

. 시리아 교회의 선교

2세기에는 시리아 교회가 인도에 전하여졌다. 두 번의 시리아 교회 교인들의 인도 정착으로 인도에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4세기 경 네스토리아 교회의 신자들은 페르시아의 박해를 피하여 약 400명이 인도의 캐랄라 지방에 이주해 왔다. 이들은 지방 왕에게 환대를 받았으며 신분상으로도 높은 계급을 부여받았다. 그들은 이미 상업에 종사하여 부를 많이 축적하고 있었기에 쉽게 인도에서 그들의 터전을 일굴 수 있었다. 현재까지 이들은 인도 전역에서 관료나 상인 은행가들로 활동하고 있다.

성도마교회는 16세기 서구의 동양진출과 함께 시작된 천주교 선교로 인해 시련을 당했다. 도마교회는 처음에는 포르투갈인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신학적인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이들은 가톨릭 교회와 교황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

1542년 예수회 소속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인도에 도착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선교의 장이 열렸다. 그는 평범한 선교사이기 보다 포루투갈 왕의 대표로서 군사력과 왕과 직접 교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왔다. 그는 국가의 권위를 배경으로 선교 사역을 감행했다. 1605년에는 예수회 신부 로베르토 노빌 리가 인도의 상류 사회를 위한 선교를 전개하였다. 그는 자칭 브라민으로 행세하며 부라민의 개종을 위해 노력하였다. 결국 그는 브라민 계층만을 위한 독자적인 교회를 세웠다.

 

. 개신교회의 선교

카톨릭이 1세기 이상 동안 인도에서 선교를 하던 유일한 원동력이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유럽에서 일어난 사건과 교회 위계조직의 부패 때문에 결국 사라져갔다. 1700년대 대부분 동안, 선교사역은 네덜란드의 작은 식민지인 트란케바르와 세람포르에서만 적극적으로 고무되었다. 네덜란드 할레 선교회(the Danish Halle Mission)의 루터교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1706년에 트란케바르를 향해 출발했는데, 그들은 하인리히 플루차우(Heinrich Plutschau)와 바르톨로메 지게발크(Bartholomaes Ziegenbalg)였다. 두 사람은 타밀어를 빠르게 습득했으며 성경 번역작업에 착수하여 마침내 타밀어로 된 신약성경을 완역했다. 지겐발크는 그 사역의 결과로 영국인 감옥에서 넉 달을 지냈다. 플루차우는 1711년에 유럽으로 돌아갔으며, 지겐발크는 그의 선교의 마지막 해에 최소한 350명의 개종자를 낸 후 1719년에 트란케바르에서 사망했다. 할레 선교회는 그 후 120년 동안 사역을 계속했다.

성공회 신부들이 영국 시민들을 돌보기 위해 인도에 있긴 했지만, 인도에서의 영국인들의 선교는 18세기 말경이 되어서야 시작되었으며 그것마저도 네덜란드령에서였다.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캘커타에서 사역하는 것이 거부당한 채 1799년에 인근 네덜란드령 식민지인 세람포르로 추방당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마침내 1813년에 영국령 인도에서 제한적인 접근을 허락받았으며 캐리가 죽기 전 해인 1833년에 무제한 접근을 허락받았다.) 캐리는 윌리엄 워드(William Ward)와 조슈아 마쉬맨(Joshua Marshman)과 함께 전도와 교육, 성경번역, 사회개혁의 사역을 했다. 그들은 최소한 36개 언어로 성경의 일부를 번역했으며, 개신교 선교의 2가지 중요한 원리를 세우게 되었다. 즉 선교사와 새로운 개종자들은 평등해야 한다는 것과 선교는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서도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령 인도가 선교에 문을 열게 한 것 이외에도, 캐리의 위대한 승리 중의 하나는 남편의 장례식에서 아내를 태워죽이는 사티(Sati)라고 하는 힌두교의 순장의식을 영국령에서 불법화시켰다는 것이다. (M.H,Gandi는 이 제도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813년에 영국령 인도가 선교사들에게 문을 열면서, 미국인 선교사의 물결이 새로 안수받은 목사들과 함께 살렘, 오레곤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고든 홀(Gordon Hall)은 봄베이에 온 최초의 미국인으로 여겨진다. 그가 도착 후 바로 사무엘 노트(Samuel Nott)와 사무엘 뉴웰(Samuel Newell)이 합류하여 미국 침례교 선교부의 첫번째 선교기지를 세웠다. 그들 3명에게 다시 루터 라이스(Luther Rice)와 아도니람 쥬드슨(Adoniram Judson)이 합류했다. 쥬드슨은 영국령 버마로 갔고, 라이스는 미국으로 되돌아가 선교의 중요성을 옹호했다. 1815년에, 노트는 봄베이에서 단 3년만을 보낸 후, 건강문제로 떠났고 뉴웰은 1821년에 콜레라로 사망했으며, 홀은 1826년에 봄베이에서 사망했다. 그들은 함께 신약성경을 마라티어로 번역했으며, 봄베이에 선교의 문을 열었다.

20세기 전반기에도 뛰어난 선교사들이 인도에서 그 역할을 감당했다. 메리 리드(Mary Reed)1885년에 인도에 도착했다. 경미한 병을 앓은 후, 나병환자 수용소에서 회복하기 위해 히말라야 산맥으로 갔는데, 1890년에 휴가 차 미국으로 귀국해서는 문둥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인도로 돌아가서 1943년 사망 때까지 나병환자 수용소에서 사역했다. 에이미 윌슨 카미클(Amy Wilson Carmichael)은 일본에서 15달 동안 사역을 하다가 1895년 남인도로 갔는데, 그녀의 중심 선교사역은 어린이들이었다. 1931년에 그녀는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절름발이가 되어서 경건 서적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2. 인도 기독교의 현황

인도의 인구는 10억 이상

기독인 비율: 3.9%

복음주의 비율: 0.6% 선교사에게 부분적으로 개방

인도의 기독교 인구 비율은 전체 인구의 2.5%인데 실질적인 비율은 3-4%라고 한다. 신자의 구성비는 불가촉 천민이나 하층 계급이 80%이다. 매년 약 180만명의 신자가 새로 생긴다고 한다. 인도의 기독교인구는 44백만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대부분은 남부와 동북부에 집중되어 있다. 주요 교파의 교세로는 로마천주교가 22,460교회에 신도 1500만명이고, 개신교중에 남인도교회가 9,300교회에 170만명이다. 다음으로 북동인도 침례교연맹이 160만명, 연합복음주의 루터교회가 160만명, 북인도교회가 100만명, 텔레구침례회가 78만명, 말 토마 수리아교회가 72만명이다.

지역별로 자세히 살펴보면, 나갈란드주가 91만명의 인구 중 80%가 기독신자이고, 미조람주는 50만명 인구 중 86%이상, 메갈라야주는 136만명 중 47%이상, 마니푸르주는 160만명 중 31%, 고아주는 1,300만명 중 32%, 앤다만제도는 19만명 중 26%, 케랄라주는 2,840만명 중 21%, 아루나 찰프라테시주는 72만명 중 6%, 타밀나두주는 5,420만명 중 5.8%, 앗삼주는 2,230만명 중 4.5%, 안드라프라데시주는 5,980만명 중 4.45%, 카르나타카주는 4,100만 이상 인구중 2.1%가 기독신자이다. 이상에서 보면 인도의 북동쪽 주들 즉 방글라데시 바로 동쪽에 있는 주들이 많은 기독신자의 분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의 피가 뿌려진 인도교회, 19백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인도 기독교는 아직도 인구의 3%선을 턱걸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걸행위를 하는 교회와 기독교기관이 즐비한 형편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많은 신학교가 세워지고 신학자들이 배출되며 성경에 충실한 교회가 늘어나고 있다. 교회의 자립과 아울러 개척교회 설립, 선교사 파송에 힘을 기울이는 교회와 성도들도 생겨나고 있다.

 

3. 선교현황과 전망

지금 인도에는 대규모의 잘 조직된 통 문화적(Cross-Cultural)'선교사역이 이루이지고 있고 거의 모든 지역에 교역자가 파송되어있다. 특히 외판원, 상인, 어부, 행상인, 안마사, 농사꾼, 세탁업자, 대학생 등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보음 전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인도에는 약 900명의 국적을 포기한 기독교 사역자들이 미복음화 지역에서 복음전파에 힘쓰고 있으며 성경도 1,600언어 중 110개로 번역되어 있고 복음서는 300이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인도 선교단체에 의해 모집되는 선교사 지원자들은 대부분 젊은이들로, 이들은 선교대회나 회합을 통해 도전을 받고 선교에 참여하게 된다. 어떤 지역에서는 한 가정이 선교사를 맡아 후원하기도 한다. 주부들은 선교사역을 돕기 위해 식사준비 때마다 한줌의 쌀을 따로 떼어놓기도 하고 암탉 한 마리를 구별해 놓아 그 닭이 낳는 알을 팔아서 선교헌금으로 쓰기도 한다. 이러한 후원의 상당한 비율이 농촌교회에 의해 이루어짐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1986년에 인도 교회는 전도자와 교회개척자로 약 4,200명의 인도인들을 파견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것은 그 이후로 더욱 증가하였고, 주요 교회 개척사역은 인도의 미전도종족 가운데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직도 기독교를 믿는데 있어 많은 위협적 요소가 인도사회에 내재해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를 믿을 경우 사회와 공동체에서 추방이나 소외를 당하는 것이 전도에 있어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카스트제도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하에서는 가족의 명예에 손상을 준다는 것도 무시 못할 일이다. 또한 그들의 미신적 신앙이 전도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많은 힌두교도들은 그들이 다른 종교의 신을 숭배하게 되면 신의 진노를 살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재산 및 경제권의 상실도 사람들이 개종을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즉 낮은 계층의 학생들은 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있는데 자신들이 개종할 경우에 정부의 지원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결혼상의 어려움, 심지어 폭행이나 형벌까지도 주어지므로 모두들 예수 믿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요인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많이 누그러졌음을 말해준다. 또 반복되는 복음의 접촉이 이제는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일정기간의 교육과 토의가 상류계층에서 상당한 열매를 맺고 있으며 학생들을 향한 전도가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인도 당국에서는 공식적인 선교사는 받지 않으나 농업, 의료 등 특수 직능자를 받고 있는데 현재 알려진 주재 외국 선교사는 900명이며 자국파송 선교사는 120단체에서 4,200명이다. 2천 여 년의 긴 선교사역 속에서도 아직 3%미만의 기독교 인구를 갖고 있는 인도는 전세계 교회의 선교 대상지이다.

선교사 입국의 제한과 반대 세력들이 있는데, 첫째로는, 힌두교의 지도자들과 교도들이며, 둘째로는, 인도 정부의 선교사 입국제한 조치이다. 셋째로, 인도 기독교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1974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후 지나친 국가 중심의 민족주의와 서구적 자유주의 신학의 수입으로 선교의 성서적 개념이 혼란을 겪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사회봉사와 복음선교의 구분이 희미해졌고, 많은 신학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행하신 굶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고치며, 옥에 갇힌 자를 해방하는 일만을 강조하고 선교의 주제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를 통한 구원의 문제는 경시되어 온 것이 그 주된 원인이 된다고 보아진다.

 

4. 인도 한국 선교사와 선교사역

 

. 인도 주요도시의 선교사님들의 주소와 사역

1) 델리(New Delhi) 고해성, 윤정자 선교사

10-N Central Gov't Housing Complex

Vasant Vihar, ND-57

전화) 687-159

 

2) 봄베이(Mumbai) 백종태, 박경란 선교사

22-6, Ishwar Bhawan, A' Road. Churchgate,

Mumbai-400020

전화) 285-5056

 

3) 마드라스(Madras) 최광혁(E-land)

A-5, 4th floor, Fables APT, New Beach Road,

Valmiki Nagar, Thiruvanmiyur, Madras-600041

전화) 41-8232

 

4) 벵갈로르(Bangalore)

13년째 인도에서만 사역하고 계신 이용범, 노은경 선교사님이 계신다. 열악교회에서 파송을 받으셨고 현지 선교단체인 Christu Krupa Fellowship을 중심으로 사역하고 계신다.

Mr. Lee Young Beom

C.K.F. 141, Grape Garden, Kariyanapalya,

Thomas Town, Bangalore-560084

전화) 001-91-80-546-3778

 

5) 크리쉬나기리(Krishnagiri)

1980년 한국 장로교 최초로 영락교회 후원으로 총회파송을 받은 김영자 선교사님이 어린이 집과 학교를 중심으로 사역해 나가고 계신다.

Young-Ja Kim

Trinity Childern's Home & Matriculation School

P.O.Box7, Krishnagri 635001

Tami Nadu, South In

전화) 001-91-4343-22567() 30392(학교) 22413(FAX)

 

. 김영자 선교사님의 사역

1) 어린이집 사역(Trinity Children's Home)

김선교사님의 가장 중점적인 사역으로, 사회신분이 낮고 가난하여 정상적으로 양육 받기 힘든 결손가정의 아동들을 모아 함께 생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매일 예배와 성경공부 시간을 갖는다. 현재 약 35명의 아동들이 있으며 이 들은 부속시설인 Trinity Marticulation School을 다니고 있다. 연령층은 4세부터 17세까지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수용어린이 선정은 현지인 사역자나 기독교인들의 소개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시설은 식당, 공부방, 놀이실, 예배실, 객실, 샤워실과 침실이 있는 3층 벽돌 건물이다. 새벽5:30분터 하루일과가 시작되며, 예배와 소그룹성경공부, 영어성경공부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주일 설교는 선교사님이 영어로 설교하면, 현지인이 통역하고 있다.

 

2) 학교(Trinity Marticulation School) 현지인 사역

인도에서 신분이 낮거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동들은 진학의 기회를 얻기가 어렵고 특히, 영어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무리다. 이런 아동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복음 증거를 위해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98년 현재 유치원부터 9학년까지 약 350여명의 학생들과 20여명의 선생님들이 계신다. 97년 주정부로부터 학교인가를 취득한 상태여서 인근 지역에서 명문 사립학교로 인식이 좋아지고 있다. 매일 아침 25분간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학생들은 아침조회시간을 통하여 찬양과 율동, 그리고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진다. 매년 부활절과 성탄절 전에는 일주일간의 성경학교를 가지고 있으며, 이 집회를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학교 사역과 별개로 화요일 저녁에는 빌리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화요모임이 있다. 이들은 가난해서 학교를 다닐 수 없거나 혹은 공사장에서 일하는 어린아이들이다. 설교와 찬양과 율동 그리고, 간식 시간을 갖으며, 현지인 성경교사가 인도하고 있다.

3) 현지인 교회사역

선교사님이 개척한 교회에 현지인 사역자를 세우고, 그들에게 자립할 때까지 생활비를 보조하고 지속적인 후원을 해 오고 있다. 그 중 Gangaram 교회는 재정적으로 자립하여 운영되고 있다.

 

. 김용범 선교사님의 사역

1) Christu Kurpa Fellowship 교회의 사역을 중심으로

김용범, 노은경 선교사님의 사역은 일상적인 교회사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자양육과정인 Discipleship program을 진행하면서 현지인 지원자를 양육하는 6개월간의 코스가 진행될 동안은 주로 이 제자화 훈련 프로그램 일정에 의하여 시간이 배정된다. 새벽 5:30분 경건의 시간을 시작으로 해서 저녁 9시부터 사택에서 한시간 가량 갖는 가정예배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교회사역으로는 주일 오전 10시에 현지인 목사의 인도로 있는 타밀어 예배 후에, 죽일학교 선생님들은 인근 지역들에 개척된 주일학교로 각자 흩어져서 길이나 건물이나 또는 빌린 집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배를 드리는 귀한 사역을 감당한다. 흩어졌던 교사들과 교인들은 오후 5시에 다시 모여서 저녁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는 시간을 가진다. 교회안에서는 두 개의 반으로 편성된 유치원도 운영되고 있다.

2) 그 외의 사역들

이용범 선교사님은 한인 선교회의 회장으로서 전인도 한인 선교대회를 주최하시거나 인도의 기독교 단체들에서 주관하는 행사들에 적극적으로 연합하고 활동하시는 등 포괄적인 사역들도 감당하고 계신다. 교회의 현지인 사역자인 Ransan 형제는 주일학교 개척지역과 빈민지역에 기도모임을 개척하여 매주일 4, 5회 정도의 순회설교를 하며, 요청에 따라 심방하고 기도하는 사역도 하고 있다.

 

5. 미전도 종족 선교 정보

 

. 빌족

교회 현황 : 일부 지역의 빌 종족은 복음을 듣고 있지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단지 카와리아에서만 중요한 반응이 있었고 마하라쉬트라 지역에 기독인이 가장 많다. 빌 종족을 위해 사역하는 단체들로는 파트너스 인터내셔널과 웩(WEC), 우정 선교 기도회가 있다. 우정선교기도회는 마을에서 빌족과 함께 일하면서 열 가정이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 모임을 개척한 뒤 이 예배모임을 다른 선교단체에 맡기고 다른지역으로 떠났다. 마하라쉬트라는 예배 공동체가 있지만 그외 지역의 빌 종족 가운데에서는 예배 모임이 없다.

성경 번역 상황 : 사구남의 보고에 의하면 빌 종족은 거주지마다 신약성경이 있고 성경전체가 번역된 방언은 마다야 프라데쉬어이다.

 

. 한족

예배처 : 3

기독교에 대한 태도 : 기독인과 카톨릭 신자는 많이 있으나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 위에 분명하게 서 있지 못하다.

 

. 데칸족

기독교인 : 0.001%미만

예 배 처 : 미상 실질적 신자 : 100여명

파송 선교사 : 미상 성경보급 : 다키니(1905년 이후 재판하지 않았다).

기독교에 대한 반응 :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다.

 

. 가르왈리족

복음화 현황 : 1990년 현재 1명의 목회자와 1명의 선교사, 한 곳의 사역 단체가 있다. 2,800명이 그리스도를 모셨으며 이는 전 종족 수의 0.03%에 해당한다. 0.4%만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으며, 이 종족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 주는 곳이 없다.

성경 번역 : 1827년 신약성경이 절판되었고 1876-1966년 성경전체를 번역했으며 성경에 대한 힌디어 재판권은 IVP에 있다. 성경에 대한 관심이 없고 힌두교의 강력한 카스트제도로 인해 성경 보급이 지연되고 있다. 문자해독률은 25%이다.

기독교에 대한 태도 : 종교적 변화와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다. 힌두 문화는 종교와 하나로 결속되어 있어 타종교의 개입을 문화적 얼의 침해로 보기 때문이다. 종교적 결단은 개인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소속 집단이 하는 것이므로 개종은 심각한 사회경제적 제재를 유발시킨다. 해외에서 온 타문화 선교사는 아주 비효과적이며, 또 입국이 거의 불가능하다. 인도내의 타종족이 연약한 데칸족 교회를 지원하는 것이 효율적인 선교방법이라 할 수 있다.

 

. 곤드족

1894년 스웨덴의 복음주의 루터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나 총 기독인이 몇 명이고 예배처가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성경은 아딜라바드, 베툴, 만들라, 친드와라방언으로 부분적으로 번역되었으며, 신약성경 제 1판은 1985년 베툴 방언으로 초안되었다. 힌디, 텔루구, 마라티어는 성경 전권이 번역되어 있다. 에브리 홈 쿠루세이드는 기독도서를 담당하고 있으며 마하라쉬트라에서는 복음 테이프를 볼 수 있다. 힌디 텔루구 마라티어로 복음방송이 전송되고 있다.

미국의 보수침례선교회, 인도의 복음주의 루터교회, 인도의 인도 메논 교회, 인도 복음주의 선교회, 인도 마드라스의 교회성장연구소가 활약 중이며 사역자로는 인도 국재 선교사가 7명 있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며 타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들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곤드족 기독인과 교회 지도자를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곤드족을 위해 봉사하는 사역 단체도 후원해야 하고, 특히 혈족관계에 있는 타종족이 이들을 복음화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글자교육, 교육, 의료 서비스 및 지역사회개발 참여가 이들의 마음 문을 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미나족

인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모든 종교를 관용하고 신자들에게 자기 종교의 선전을 허용하고 있지만, 원리주의자들의 부상으로 여러 종교 간의 긴장이 근래 들어 고조되고 있다. 긴장의 고조로 기독교의 선교 활동이 위축되고 있으며 인도 외부에서 오는 새로운 선교사는 더 이상 받지 않고 있다. 라자스탄에서 활동중인 외국인 선교사는 모두 로마 카톨릭 소속이다. 인도인 기독교 사역자들은 인도 자위대의 지방 지부로부터 받는 가혹한 처사를 보고하고 있다. 자위대는 인도를 개종하려는 기독교 및 외국의 타종교로부터 힌두교를 보호하는 보호자라고 자처하고 있다. 라자스탄 및 인도의 여러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이 자위대 갱단으로부터 몰매를 맞았으며 부도덕 및 사회적 행위라는 중상모략적인 기소를 당하기도 했다.

수년 동안 라자스탄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기독교 선교사에 저항적이고 적대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기독교 선교사역이 라자스탄을 피해 이루어져 왔다. 18세기 초엽 처음으로 복음을 소개한 단체는 카톨릭의 예수회이며, 개신교는 성공회와 장로교회가 형식적으로 연합한 북부교회가 활동 중이다.

 

. 람바디족

기독교인 0.5% 실질적 신자 0.3%

성경 보급은 쪽성경이 있으며 번역이 진행 중이다.

사역단체 : 남인도교회, 미국침례회, 반라자개발사역회, 집시성경훈련학교가 복음전도, 성경번역, 글자교육, 교회개척, 영화선교에 힘쓰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반응은 기독교를 꺼리고 경계하며 복음에 저항적이다.

 

. 쿠리치야족

쿠리치야족은 지위가 높아 이들이 개종하면 주위에 있는 타종족을 복음화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종족을 전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예전에 병자를 위한 기도를 주술사의 주술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 적도 있으나 지금은 기도가 무어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쿠리치야인들에 대한 선교 전략은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 모임을 만들어 복음적인 성경공부도 함께 하는 것이다.

 

. 펀자브족

현재 인구 비례 상 기독교인이 열세이지만, 수적으로는 강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기독인의 99%가 힌두교에서 개종했거나 개종한 기독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단지 소수만이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을 뿐이다. 지금도 이슬람교도를 교회의 일원으로 개종시킬 만한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

 

. 자인족

소수 기독교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에게 전해진 복음이 문화적으로 적합하게 전해 졌는지는 의문이다. 성경보급은 구자라티어나 힌디어로 된 전성경, 마라티와 칸나다

 

. 자트족

기독교인 : 1%미만 실질적 신자: 1%미만

성경보급 : 힌두어와 구자라트어로 성경전체가 번역되었다.

사역단체 : 인도복음선교회

 

. 카나리족

예배처가 한 곳 있으며 어떤 사역 단체가 혹은 몇 명의 선교사가 사역중인지는 알 수 없다. 카나리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는 우선적으로 칸다어로 된 기독교 도서가 필요하다.

 

. 카슈미르족

수십 년 전 처음으로 외부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카슈미르 베일에 들어갔으나 지금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이들은 처음에 들어가서 학교 교육과 의료봉사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곳의 모슬렘들은 점점 호전족으로 돌변하였다. 인도 남부에서 온 몇몇 인도인들이 선교사라고 자처하고 있으며 잠무와 카슈미르의 여름 수도인 스리나가르에 개신교 소속 교회가 하나 있는데, 이 교회는 북인도 교회와 연관을 맺고 있다. 카톨릭에서도 짐무와 카슈미르 지역에서 활동중이다. 교회가 존속하기는 하지만, 카슈미르 기독인을 훈련시켜 복음 전도자로 만드는 데는 아직도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기독교인은 약500, 예배 처 미상, 학교는 4개미만, 병원/의료기관은 2곳 등이다.

교회사 : 1854년 최초로 선교사가 입국했으며 1859년부터 복음사역이 계속되었다. 영국런던주재 교회선교사협회가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선교사들은 1.000-1.500여명의 폭도들에게 위협을 받곤 했다.

성경 및 기독도서 : 성경은 1821년 사라다글로 신약성경을 번역했으나 현재 이 글은 사용되지 않는다. 1899년 아랍어로 성경전권이 번역되었고 알파벳으로 일부를 번역했다. 4복음서 및 사도행전은 고유한 카슈미르어로도 번역했다. 기독도서로는 잠무와 카슈미르에서는 기독도서 구입이 제한적이지만 외부에서 보다 많이 구할 수 있다.

 

(14) 오라온족

선교단체들 : 독일 고너스 복음주의 루터 선교회, 복음주의 전도협회-런던, 예수협회,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선교회, 더블린대학 선교회, 7일 안식교

연합성서공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1895년에 성경 이야기책이 번역되었고, 1950년에는 신약성경이 처음으로 번역되었다.

 

(15) 타밀족

기독교도 : 5% 참신자 : 2.5%(150) 성경 : 완전 번역됨

사역하는 곳 : 새생명센터, 청년선교회, 인도기독교운동, 이스마엘 구원협회, 임마누엘선교회

기독교에 대한 반응 :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다.

 

(16) 텔레구족

CMC에서 3명의 신교도 회중이 모인다. 텔레구 종족 중에서 일하는 선교사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안드라 프라데쉬는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문학 서적과 성경을 가지고 있다.

 

(17) 티베트족

티베트족은 오랫동안 외부로부터 격리되었었다. 최근에 3개의 선교단체가 인도의 티베트족에게 선교하고 있다. 아직 그들이 복음에 접하지 않았으나 어떤 이들은 지금 접촉하고 있다. 이미 추방된 선교사의 명단을 알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의 문제는 몇 명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직은 모호한 편이다.

그들은 복음에 약간의 반응이 있었다. 1%미만이 신자이다. 대략 333명당 1명이 신자이다. 티베트인 신자가 있는 교회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성경번역 상황 : 창세기가 1862년에 번역되었다. 신약전부가 1889년에 번역되었다. 1948년에는 성경 전부가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대부분의 성경이 중국 당국에 의하여 훼손되었기 때문에 성경을 사용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티베트 지방보다 인도에서 티베트인들에게 향한 성경의 보급이 더 자유롭고 효과가 있다.

 

(18) 파시족

기독교인 수 : 1%미만 실질적 신자 : 1%미만

성 경 : 완전 번역되어 있음

기독교에 대한 반응 : 폐쇄적이며, 반대하는 입장

 

. 인도 선교의 장애요인과 선교 전략

1. 선교장애 요인

. 정치, 종교적 상황

인도는 수천년 동안 힌두교 문화에 지배되어 왔다.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나 실제 사회생활에서는 타종교에 대해 차별 정책을 펴고 있다. 만일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독교식 이름을 가질 경우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현 집권당은 정교분리 정책을 펴고 있으나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위한 정당성과 명분을 얻기 위해 힌두교를 그들의 정치 이념으로 삼는다. 더구나 현 제1당으로 부상한 BJP는 힌두교 근본주의를 당헌으로 규정하고 있다. 힌두교는 표면으로는 대단히 포용적이어서 타종교에 대하여 강한 거부반응을 나타내지 않으나 내부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외국인 선교사의 정상적인 활동이 금지되어 있으며 힌두교 과격 단체인 R.S.S.는 외국인 선교사 추방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힌두교는 인도에서 여전히 성장하고 있으며 교리적으로 다른 종교들을 신축성 있게 포용하는 유연성 때문에 기독교 선교가 힌두교에 의해 변형될 정도이다. 힌두교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종교들보다 복잡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세계의 모든 종교 가운데 가장 정의를 내리기가 힘든 힌두교는 거의 5,000년의 기간에 걸쳐 인도의 모든 종교적, 문화적 운동을 흡수 동화시키면서 서서히 생겨나게 되었다. 생활 양식으로서의 힌두교는 근본적으로 절충주의적이며 혼합주의적이다. 힌두교의 뛰어난 점은 그 영향권 내에 들어오는 모든 종교적 믿음이나 관습들을 동화시키는 능력이다. 힌두교에는 가장 중요한 3신 외에 3억의 신이 있다. 이들 3억의 신들만큼이나 힌두교에는 어떤 다른 종교도 극복할 수 있는 엄청난 흡인력이 있다. 몇 천년을 내려오면서 형성된 힌두교는 다른 종교인들과 인도인들을 매혹하고 있다. 이와 같은 힌두교의 성격이 기독교 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경제력도 힌두교에 집중되어 있다. 카스트 제도하에서 힌두 상부계급은 조상대대로 부를 축적해 왔으며 오늘에 와서도 이러한 부를 활용하여 자본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들의 자본이 자연히 힌두교 사원에 흘러들어가 힌두교를 유지 지탱한다. 반면 많은 기독교 교회들은 자립을 위해 허덕이고 있는 형편이다.

 

. 사회문화적 상황

인도 교회는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다양성과 통일성을 함께 지닌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도 사회는 집단이란 개념을 개인보다 강조해 왔다. 카스트 제도도 이러한 문화적 바탕 위에서 발전하였다. 카스트 제도는 선교적 측면에서 장점으로보다는 단점으로 작용하였다. 교회 개척 사역은 한 카스트 내에만 한정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인의 만인 평등사상이 그들에게 이방의 사상으로 여겨진다. 1860년 대 이후 많은 수의 불가촉 천민들이 기독교로 집단 개종을 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오히려 기독교를 천민의 종교로 인식하게 했으며 특히 상류계층의 선교를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카스트의 공동체성은 개인회심의 가능성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인도의 문화와 풍습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공용어만 해도 18개 언어에 다다른다. 여기에 종교, 빈부의 차, 사회 계층의 차이 등을 감안하면 그 문화의 다양성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 선교 방법을 모색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 인도교회 자체의 문제점

인도 교회는 도마 이래로 2,000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아직까지 인도사회의 주류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다. 많은 문제점들이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문제점은 인도 성직자들의 사명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오늘에 와서 타종교와의 대화로 종교 혼합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의 영향으로 구원의 절대성이 이들에게서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 간디의 영향력

간디는 현재 인도에서 신적 존재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큰 장애요소다. 그는 그리스도는 기독교에서만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백성에게 그들이 어떤 이름으로 경배하든지 속해있다고 하였다. 간디는 모든 종교는 다 진리이며 보편종교의 반영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상화된 그리스도에게 지극한 숭배를 표했지만, 역사적 그리스도의 성육신, 속죄,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또한 그는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화평과 조화의 방해물로 여겼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개종이란 자기 정화와 자아실현이었다.

 

. 경제적 상황

인도 힌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데 당면한 어려움은 경제적인 문제이다. 개종을 하면 정부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도 교회의 당명과제는 많은 교회들이 미자립 교회라는 것이다. 교인이 100명 가량 모여도 교역자 생활비를 충당하지 못한다. 교인들의 대부분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자립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사역의 주된 일이나 인도 대부분의 교회의 자립은 아직 요원한 상태다.

 

2. 인도선교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들

 

. 인도인의 민주의식

350년간의 영국 통치기간을 통해 서구적 민주주의 의식은 국민생활에 보편화되어 있다. 도시와 지방, 상류층과 하류층, 식자와 문맹자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개인적 자유에 대한 존중,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해결, 다수결에 대한 승복 등 민주적 사고방식은 체질화되어 있어서 인도 정치 체제 유지에 보이지 않는 큰 기둥이 되어 있다.

 

. 관료제도와 지도층의 부패

직업공무원제도의 확립은 인도 국내정치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며, 최고의 교육과 전문기술을 구비한 이들 관료층은 그 자체가 하나의 뚜렷한 계층을 이루고 있으며, 국정집행의 핵심체로서 정치권으로부터 확연히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 지도층의 부패와 사회 전체에 만연한 비능률은 인도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점이다.

 

. 인도인의 종교성, 샤마니즘적인 신앙과 인도문화에서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 등

 

 

 

. 인도의 카스트간, 종교간, 민족간의 갈등

인도의 사회적 고질인 카스트제도의 타파, 특히 전체 국민의 21%에 해당하는 최하층 천민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문제는 인도가 안고 있는 큰 어려움 중의 하나이며, 교육, 고용 등 여러 분야에서 이들을 중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방에서는 폭력 충돌사태가 빈발하고 있다.

그리고, 83%를 점하고 있는 힌두교도와 13%의 이슬람교도는 두 종교간의 대조적 교리, 전통 등의 차이로 항상 반목, 대립의 소지를 안고 있다. 정부의 이슬람교도 포용정책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도 들은 소수집단으로서의 소외감, 경제적 낙후, 일부 극단분자의 사주 등으로 92.12월의 아요디아 사태에서 보듯이 항상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또한, 독립이후의 지도자들은 비대한 연방국가에서 생길 수 있는 소수 민족문제 내지 지역주의 감정을 제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 왔으나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펀잡지방에서의 시크 문제와 아쌈을 포함한 동북지방에서의 Mizo족 및 Naga족 등 소수민족문제는 지역주의 감정과 함께 인도의 난제이다.

 

3. 선교전략

인도는 크고 다양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선교전략을 논함에 있어서도 전체로서가 아니라, 종교, 지역 또는 집단을 구분하여 별개의 전략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 상류층 선교

이미 앞에서 상술되었던 바와 같이 인도의 기독교인 비율은 3% 선이면서도, 기독교인의 80%는 하류층에 해당된다. 그리고, 카스트 제도가 만연되어 있는 인도 사회에서 기독교가 하층민들의 종교로 인식되어버리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보다 적극적인 상류층선교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를 위하여 가장 용이한 접근 방법이 대학생 선교라고 생각된다. 이와 아울러 인도 사회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관료계층의 선교전략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 천민과 일반인 선교

인도사상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기보다는 샤마니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방향으로서의 접근과 능력대결적인 선교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교육과 의료선교에 보다 주력해야하고, 고아원, 나병환자 등등을 섬기는 사회봉사적인 측면이 보다 강화되어져야 한다.

 

. 문화선교

인도인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국민은 없으며, 그들의 축제 문화도 발달되어 있다. 인도의 기독교는 영화나 방송에 대해 방어적 위치에서 오히려 영화나 방송을 선교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인도인의 경우는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할 뿐만 아니라 영화의 표현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여느 아시아 국가들에서 볼 수 있듯 다양한 색채들은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고 그들의 몸짓과 손동작 하나 하나가 그들만의 의사표현이 되고 있다. 기독교는 이러한 정황을 이해하고 이들만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통해 그들의 좋아하는 그리고 그들이 공감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인도인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한다거나 그들의 전통 음율을 따라 복음송가를 제작하는 것 또는 교회 의식들을 그들의 전통적인 문화의 이해와 접목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주는 것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현지인과 선교사의 협력이 필요한 분야이다.

 

. 기업선교

인도는 현재 경제의 많은 부분에서 개방화 정책을 펴고 있다. 개인이 개종을 하면 공동체에서 벗어나 생계의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는 인도의 상황에서 기업 선교는 중요하다. 기업선교를 대학교 사역과 관료계층 선교사역과 연계할 때 위력이 있을 것. 그러나, 이러한 기업 선교가 개종자들을 그들의 삶의 터전인 공동체로부터 분리를 당연시 여기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개종자들이 지속적으로 그들 공동체와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도와야 하고, 그들이 그들 공동체를 향한 복음의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사회 운동적인 측면

실제적인 힌두교적 사고방식의 모순을 사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선교하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교회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지를 몸소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이러한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 상황들에 대해 교회가 직접적으로 어루만져 주는 보살핌의 프로그램을 통해 힌두 사상이 발생시키는 문제들에 대해 우리 기독교가 인도 현지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인도의 여성인권문제나 노숙자 문제, 어린이 보호시설이나 환경과 보건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가 적극적인 보살핌과 관심을 보여줄 때, 그리고 현대적인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극빈 하층민들에게 무조건적인 인술을 베풀 때에 인도 선교가 좋은 시작점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도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첨단과학분야에서도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국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러한 혜택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새삼스럽게 그들만을 위한 혜택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특수 교육이 필요하다. 직업교육이나 최신 기술을 전수하는 기술들도 전수되어야 한다. 기독교가 그들을 생활 공동체화 해주어도 좋은 정황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독교 내에 들어올 때 그들은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는 위험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참고자료

- 홈페이지: 기범이의 인도여행

- 홈페이지: 인디아 이야기 http://members.tripod.co.kr/india

- 선교와 현장 창간호 157-183 박민수

- 선교와 현장 제3203-230 임명진, 양성희, 주성학

- INDIA_STORY (130 페이지 분량) 주성학 견습선교 DIARY

- 인도를 주님께로(선교현장연구 보고서) 강한별 외

부록1: 인도 선교사님과의 대화

 

1. 이용범 선교사님으로부터......

가끔씩 우리교단 파송 선교사님인 뱅갈로의 이 용범 목사님을 찾아가는데 이번에도 역시 은혜로운 말씀을 많이 전해 주셨고, 그분과 나눈 이야기들 중에 기억에 남는 내용들을 정리해 보았다.

. 인도엔 순교자가 없다.

인도에는 수없이 많은 선교사의 방문이 있었고, 심지어 사도 도마의 순교가 있었지만 선교2000년 기간에 알려진 현지인 순교자가 없다고 한다. 순교자의 피흘림과, 죽음이 없는데 어떻게 교회가 서겠는가? 주님의 교회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과 죽기까지도 주를 사랑하는 그 모습들 속에서 인도의 교회는 성장할 것이다. 마치 한국 교회의 선교 역사가 짧으나 수많은 순교자의 피흘림과 기도의 토양 가운데서 교회신앙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이다.

 

. 자신들이 일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철저히 한국인에 의해 세워졌다. 한국동란 이후 빈곤과 전무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의지했고 자신의 집보다는 교회를 먼저 세운 것이다. 선교사의 물질적 후원에 힘입어서가 아닌 자신의 것을 내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인도는 모든 것을 선교사가 해주기를 바란다. 땅사고, 집짓고, 사례비 주고, 학교 세우고.. 인도의 수많은 사역자들이 너무 이익에 빠르다고 한다. 결국 인도인에 의해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선교의 공백기간에는 고아가 되버리고 무너져 버리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힘과 기도가운데 교회가 세워질때야 그들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또 주의 일을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 세례표는 구호표가 아니다.

세례는 천국가는 ticket, 선교사에게서 구호품을 받는 구호표 정도로 아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중생과 구원의 확신 없이는 세례주지 않겠다고 하자 다른 교회로 옮긴다고 했다는 것이다. 세례는 구호표가 아니다!

 

. 물질에 밝아선 안된다.

어느 큰 교회 목사는 자기교회당을 상가처럼 짓고 예식장과 식당들을 경영하는데 돈을 받고 대여해 준다고 한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자기교회 사역자가 목사안수를 받고 축하모임을 갖는데 그 좋은 교회 식당은 제쳐두고 다른 초라한 지하 식당에서 접대하더라는 것이다. 그 시간에 다른 모임에 교회를 예식장으로 또 피로연 장소를 식당으로 대여해 주고 돈을 벌어야 하니까...결국 그 교회의 식당과 홀은 힌두교와 무슬림에게 돈을 받고 빌려주고, 밤새먹고, 마시고, 놀고, 노래하고... 자신들의 신을 교회에서 찬양하고... 이런 실정이다.

 

. 4-5억의 사람이 더 있다.

불가촉천민(untouchable people)이라는 최고로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산에서 사는 부족들이 약 40% (4)정도 있는데 이들을 복음화할 전략이 필요하다고 한다.

 

 

 

2. 최영준 선교사님과의 대화

 

29세때 단신으로 (‘91) 인도에 건너와서 힌디를 공부하고 현재는 한인 선교사님들 중에서 힌디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선교사이다. 최선교사님이 언어를 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본인은 독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가정을 가지고 오기에 아이돌보랴,여러가지 일에 신경 쓸랴... 진도도 늦어지게 되고 또 1년 정도 배우면 어느정도 언어가 되니까 그만두고 영어사역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선교사님은 말하기를 소수층을 위한 영어 사역보다는 현지의 국어를 배워서 그들을 전도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 최선교사님이 언어를 성공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비법들

1) 독신이었고 젊었다. - 다른데 신경을 안쓰고 2-3년 언어 습득에 전념했다.

2) 언어를 위해 처음 2-3년을 투자했다 - 다른데 신경 안쓰고 오직 언어만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3) 2년반 정도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다음엔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 혹은 복음과 관련된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힌디어로 진행되는 DTS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4) 생활과 또 여러 가지 삶 속에서 사용하는 말들을 배우기 위해서 매일 영화를 보며 여러 종류의 단어 그리고 표현들을 익혔다고 한다.

5)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도 매일 힌디어로 성경 읽고 묵상을 했다.

6) 언어에 대한 부담감을 늘 가지고서 공부에 임했다고 한다.

7) 파송한 단체에서 사역의 부담보다는 첫 단계에서는 언어습득을 위해서 시간을 쓰라고 배려함

 

. 현지어의 유익에 관해서

1) 현지어로 된 문서가 적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교재, 신학서적, 전도지... 현지어로 문서사역을(출판과 번역)을 감당할 수가 있다.

2) 헌신된 사람들 중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현지어 신학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

3) 보다 많은 대중에게 접근할 수가 있다.

4) 처음에는 어려우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사역의 힘을 실을 수가 있다.

 

. 주의사항

1) 현지어에 대한 부담을 가지라

2) 2-3년간 죽어라 공부하라. 중간에 사역에 뛰어들게 되면 다시 공부할 기회가 없다. 소수영어 인구보다는 현지어 사용하는 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언어습득을 위해 한텀을 투자하라

3) 너무 일찍 결혼하거나, 아이들을 갖는 것도 여러모로 힘들다함(그분의 소견)

- 위의 내용은 최선교사님의 개인적인 얘기이다. 그리고 많은 도전을 준 젊고 패기 있는 분이셨다.

 

 

3. 서 목사님과의 대화

 

대만에서 사역하시다 오신 서 목사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린 나에게 몇 가지를 충고해 주셨다. 그분은 연세가 63세 이셨는데 아주 열정적인 분 같았다.

. 철야기도와 금식기도 훈련을 해라

현지에서 영적 도전이 많다. 기도하지 않으면 넘어진다. 한국에서부터 기도훈련 많이 해라

. 제자 훈련을 위한 교육을 철저히 받고 성경에 대한 깊이가 있어라.

. 현지교회와 협력해라. 독불장군 식으로 나가지 마라.

. 기도하는 아내를 맞이해라.

 

 

4. 김 선교사님으로부터

 

이 내용은 김 선교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분이 나름대로 사심 없이 아들 같은 사람이 선교사가 되겠다고 조언을 구하자 들려주신 말씀들이다.

 

. 보여주기 위한 선교를 지양하라 -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숫자나 형식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또한 자신의 사역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거나 자랑하지 말라. 적으면 적은대로, 크면 큰 대로 겸손하게 해나가는 것이다. 보고를 위해 부풀리지도 마라

. 선교비를 공개하라 - 돈에서 자유하는 것이 좋다. 자기 혼자서만 선교비를 사용하게 되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동역자들에게 선교비를 공개하여 같이 기도하고 고민하는 것이 오해의 소지도 없고 자유롭다. 또 믿을만한 현지인 한두 명에게 선교비를 공개함으로서 불신을 없앨 수도 있다.

. 한 영혼을 사랑하라 -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겨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한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돌보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헌신된 마음이 필요하다 - 설사 선교비 지원이 중단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 선교기관에서 훈련을 충분히 받아라 - 제대로 된 선교훈련 기관에서 훈련을 받는 것이 필요

. 다 잘할순 없다 - 다 잘하려고 하는 욕심을 버려라. 목회자가 할 일, 선교기관이 할 일이 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사역을 해라. 자기가 알고, 배운 것을 하는 것이다.

. 목회자 - 현지어를 능숙히 배워서 현지인 교회를 직접 하거나 현지인 교역자를 훈련, 교육교재를 만드는 것이다. 프로그램 사역은 선교단체가 훨씬 잘 할 수 있다. (현지인 교회와 지도자교육)

. 인간이 되라 - 상처받은 자아가 치유되어야 한다. 상처난 자가 남을 치유해 줄순 없는 것이다.

. 현지어를 능숙히 배우라 - 2-3년은 현지어를 배우는데 전념해라. 처음 1-2년 정도 했을 때 이 정도면 됐다는 유혹과 영어의 화려함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라

. 남을 비방하지 마라 - 다른 선교사들이 잘하든 못하든 비방하지 말라

. 선교사회 활동에 깊이 관여하지 말라 - 정치적인 부분에 몰두하면 시간과 힘을 선교사역이 아닌 엉뚱한데 다 쏟아버릴 위험이 있다

* 부록1은 인도견습선교사로 다녀온 주성학님의 Diary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부록2: 인도여행을 위한 안내 자료

 

1. 인도 VISA발급

2. 항공편

3. 숙박시설(숙소의 종류, 좋은 숙소 찾는 법, 숙소이용 상식 등)

4. 도시내의 교통수단

5. 통화와 환전

6. 음식 - 인도요리

7. 인도에서의 언어사용

8. 자주 묻는 질문들

. 인도는 혼자가면 위험하지 않나요?

. 돈은 얼마나 필요하며, 환전은 어떻게 하나요?

. 숙식은 어떻게 해결합니까?

. 물은 어떤가요?

. 필요한 물품들은 인도에서 살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화장지나 비누 등은...

. 짐을 묶을 쇠사슬과 열쇠를 사서 가야하나요?

. 인도에서 한국으로 전화는 어떻게 합니까? 편지는? 가격은? 인터넷은?

. 인도는 언제 여행하는 것이 좋습니까?

. 인도 여행을 할 때 준비해갈 물품

. 장기 체류시 인도에서의 생활비는?

 

1. 인도 VISA발급

한국인은 인도에 들어가기 전에 인도의 해외공관을 통해 비자를 받아야 한다. 비자에는 비자를 받은 날부터 몇 개월 안에 입국해야 하는지가 밝혀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데, 비자의 유효기간은 인도에 입국한 날부터 계산되는 것이다.

 

. 서울 주재 인도 대사관

인도 대사관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멕시코, 방글라데시 등의 대사관과 이웃하여 있다. 대사관에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철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남역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으면 영동대교와 이어지는 큰길을 만나게 되고, 이 큰길을 건너 옥수동 쪽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5분 가량 따라가면 된다. U.N빌리지 부근이다.

*주의: 한국 국경일은 물론 인도 국경일에도 쉬고 있으므로, 방문하기 전에 미리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37-3

전화 : 798-4257 / 4268 / 0962 FAX : 796-9534

비자 신청기간 : 09:30 - 12:30

발급시간 : 11:30 - 12:30 (. 일요일은 휴무)

 

. 관광비자 신청방법

대사관에 구비되어 있는 신청서를 작성한 후 여권사진 크기의 사진을 2장을 여권과 같이 제출하면 된다. 빠르면 당일 늦어도 며칠 후에는 받을 수 있다. 본인이 아니더라도 대리인등을 통해 신청하거나 발급 받는 것이 가능하다.

 

. 비자의 종류와 가격

전에는 한번의 입국으로 그치고 마는 1개월 기한의 Single 비자도 발급하였으나, 개정된 이후로는 한번 발급 받으면 비자의 유효기간동안 얼마든지 여러 번 입국할 수 있는 multiple 비자만 발급하고 있다. 관광비자의 경우는 3개월 짜리는 16.000원이고, 6개월 짜리는 32,000원이다. 한편 상용으로 발급되는 1(60,000) 짜리를 비롯하여 5년 이상 짜리도 있다.

 

2. 항공편: 인터넷 홈페이지....../인디아 클럽 http://www.india.co.kr 을 참고하세요.

인도로 가는 가장 싼 항공편은 일본의 ANA(전일본공수항공)입니다. 들어가는 경로는 뭄바이로 들어갈 경우 한국-오사카(1)-뭄바이 이고 델리로 들어갈 경우 한국-오사카-방콕(1)-델리입니다. 돌아오는 경우는 역순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격은 19995월 정도로 생각하면 53만원 정도이고 여기에 500루피에 달하는 인도출국 공항세가 포함됩니다.(3만원정도) 일본에 잠간 들어갈 수도 있는데, 하지만 거기에 하루 나갔다 오면, 인도에서 열흘이상 살 수 있는 돈이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보통 배낭족의 경우 세계에서 넓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오사카 칸사이 공항에서 하루밤을 지냅니다. 곳곳에 배낭족이 많고, 일행이 있으면 서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새죠. 안내 카운터에 부탁하면 담요도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밤에 무척 춥습니다. 에어콘이 빵빵하니까요) 일본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일본에 도착하면 그곳에 "인도 갈사람"하고 써들고 있는 안내원이 있거나 혹은 내리기 전에 스튜어디스가 알려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따라가면 됩니다. 혹은 Transit 표지를 보고 따라가면 입국이 아니라 갈아타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입국을 해버리면 골치아프게 되니까 공항 안내원들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영어요? 걱정 마세요. 핵심단어 몇 개만 들이미세요. "I am a trainsit passanger. Where should I go? " 이 정도만 해도 웃으며 안내해 줍니다.

 

3. 숙박시설

여행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잠자리와 음식이다. 특히 혼자 떠나는 여행객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열차는 목적지에 가까와지고, 창 밖은 어수룩해지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난다. 역에서 쭈구리고 잘까? 아니면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깡패나 만나지 않을까? 이런 저런 고민이 물밀듯이 밀려든다. 그러나 커다란 걱정은 안해도 좋다. 인도의 호텔은 언제 가더라도 묵을 수 있다(켈커타를 비롯하여 일부 지역은 예외다).

. 방갈로 형태의 공영 시설

방갈로라고 하면 산 속의 오두막을 떠올리겠지만 인도 정부 기관인 ITDC나 주정부가 경영하는 숙박시설로써 지방 관광지에 가면 제일 고급 숙박 시설이기도 하다. 이름에 구애받지 말고 일정한 설비를 갖춘 호텔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투어리스트 방갈로(TOURIST BANGALOW) 이외에 트래블러스 로지(TRAVELLER'S LODGE), 투어리스트 레스트 하우스(TOURIST REST HOUSE)등의 명칭으로 불리는 곳도 있다. 요금은 제각기 다르지만 에어컨이 없다면 트윈이 최고 300Rs정도밖에 안되므로 권할 만하다.

 

. 역의 Retiring Room

대개의 열차 역에는 열차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인 리타이어링 룸이 있다. 심야에 늦게 도착했거나 이른 새벽에 출발할 때에 편리하다. 또한 남인도에 가면 버스 스텐드에도 리타이어링 룸이 있고, 델리나 켈커타 공항에도 있다. 요금이 싼 것에 비해 청결하므로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단 방이 많지 않다.

* 참고 - 빈방이 없을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밤늦게 숙소를 잡으러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 역의 WAITING ROOM에서 잠을 청하는 편이 때로는 현명하다.

 

. 배낭족의 안식처 '게스트하우스'

우리나라 여인숙급 수준으로 대략 1~150루피 정도면 21실방을 구할 수 있다. 이 곳에서는 각국에서 몰려든 배낭족들에게서 소중한 여행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여행 동반자도 만날 수 있고 각종 기차 버스예약도 가능하다. 식사는 오믈렛이나 수프 등 간단한 음식을 팔기도 하고 직접해 먹을 수 있도록 주방까지 있는 곳도 있다. 인도 게스트하우스는 '호텔', '로지(lodge)', '(inn)'등으로 각각 다르게 표현하므로 유의해야 한다. 매연이 심한 인도에서 자려면 창문이 있는 방을 택하는 게 좋다. 같은 숙소에 묵는 사람이라도 주인 마음에 따라 요금이 천차만별이므로 잘 흥정해야 한다. 방을 비울 때는 반드시 문고리 창문고리를 점검해 도난에 유의하자.

 

. 고급 호텔

보통 호텔은 인도식(,INDIAN STYLE)과 서구식(WESTERN STYLE)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때때로 현지 호텔 목록에서도 그렇게 구분한다. 확실한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호텔 안에 있는 레스토랑이 고기를 팔며 냉방과 서양식 화장실, 그리고 샤워는 물론 욕조까지 갖춘 경우 서양식 호텔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인도식은 확실하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특히 욕조까지 완비되어 있는 호텔이 적기 때문에 인도식이라 불리는 것이다.

고급 호텔은 번화가의 중심에는 별로 없다. 고급 호텔 주위에는 숲이 많고 조용하며 넒은 정원도 딸려 있어서 싸구려 여인숙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호텔 하나가 만원이라면 바로 옆에서 구할 수 없고, 새 숙소를 물색하기 위해 안내소등으로 가려면 다시 택시를 타야 한다. , 일단 들어가게 되면 호텔 안에서 식사부터 쇼핑(상당히 비쌈), 편지 부치는 일, 기차표 예약(추가요금 요구) 등 여러모로 편리한 것이 사실이다. 외출하고 싶으면 택시나 릭샤가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으며 관광버스가 마중 나오기도 한다.

 

. 싼 호텔

버스정거장이나 기차역 근처에 싸구려 여인숙이 많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특히 지방 도시에는 1~2일 정도 묵는 여행자의 교통 편의를 고려해 싸구려 여인숙을 역 주변에 집중시켜 놓았다. 그래서 한 집을 발견하게 되면 나머지는 잇달아 찾을 수 있다.

 

. 좋은 숙소 찾는 방법

1) 직접 찾는 것이 최상: 역에 도착하면 릭샤나 호텔의 호객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몇 루피라느니, 최고라느니 하면서 유혹하지만 그들과 상대하고 있으면 요금 흥정 등으로 피곤해진다. 그러나 잘 모르는 도시를 아무 정보도 갖지 않고 들어갔을 때는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럴때는 천천히 걷다보면 대략 어디쯤 호텔들이 있겠다고 감잡을 수 있다. 때로는 다른 여행자들 쫓아가거나, 역무원에게 물어보는 것 또한 좋은 방법이다.

2) 방은 보고 결정한다: 숙박 요금만 지불한 후에 숙박을 결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요금은 방의 좋고 나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방을 보기도 전에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특히 싸구려 호텔은 겉보기로 내부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마음에 안든다면 당당히 거부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주인이 다른 방을 보여준다. 그래도 양이 안찮다면 다른 호텔을 찾아나서는 것이 좋다. 호텔은 거의 대개 몰려 있기 때문이다.

3) 늦은 밤에는 가까운 곳에서 일박한다: 인도의 도시는 밤이 어둡고 위험하다. 외지이기 때문에 일정이 어긋날 경우가 많다. 늦은 밤에 도착할 경우 리타이어링 룸을 이용하고, 방을 잡지 못했을 경우에는 가까운 호텔에 방을 잡는 것이 좋다. 만일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자고 그랬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대개 인도 택시는 밤에는 운전수와 보조 2명이 타는데, 혼자 탄 여행객에게 엄청난 바가지를 씌운다.

4) 관광 안내소를 활용한다: 공항이나 역에도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이 있고, 인포메이션에는 호텔 소개해주기도 한다. 또한 시내의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에서도 호텔을 소개해준다. 하지만, 완전히 신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

 

. 인도의 호텔 상식

1) 호텔에서는 대개 식사 제공이 없다.

2) 24시간제 호텔: 마드라스 등 남인도 호텔은 상당수가 24시간제 호텔이다. 얼핏 듣기에는 좋아 보인다. 하지만 주의를 요할 점이 있다. 아침 6시에 CHECK-IN한 사람은 다음날 6시 이전에 CHECK-OUT해야한다.

3) 호텔은 100% 안전하지 않다: 귀중품은 잘 보관하는 것이 좋다. 가끔 현금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한다.

4) 종업원이 들어오는 것은 "NO" (여성의 경우): 특히 여성인 경우에, 수작을 부리려고 질질끌며 이야기를 하려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이것저것 설명해주고 팁을 요구하기도 한다. 따라서 필요한 용건은 나와서 듣는 것이 좋다. 밤에는 반드시 문을 열기 전에 확인을 하는 것이 좋다. 물론 대부분의 인도인은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홀로 다니는 사람에게 있어서 "조심"은 꼭 필요한 것이다.

5) 영수증은 꼭 보관한다: 아우랑가바드에서 숙박비 지불에 관한 오해로 버스를 놓칠 뻔한 경험이 있다. 당시에 영수증이 없었다면 버스를 놓쳤을 것이다. 피치 못할 일로 전날에 주인에게 숙박비를 지불하고 난 후에 하루 더 머물게 되었다. 다음날 정오쯤, 호텔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얼마 후, 버스정류장에 지배인이 사람을 보내왔다. 돈을 지불하지 않고 도망갔다며, 같이 호텔에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때 만약 내 지갑에 영수증이 없었다면 하루를 더 있어야 했을 것이다.

 

4. 도시내의 교통수단

 

. 릭샤(Rickshaw) - 인도에서 가장 대중적인 도시 교통 수단이다.

1) 릭샤 - 켈커타에만 남아있다. 사람을 태운 채 인력거를 끌고 다니는 릭샤는 인도의 고통스러운 실상이자 관광자원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길거리에 마차를 세워놓은 채 그 위에서 잠을 청한다. 그들의 잠자리이자, 생활수단인 것이다. 단돈 몇 루피를 위해서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인력거를 끄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현실이 풍요롭기만 한 것 같다.

2) 릭샤왈라(Cy-Rickshaw) - 자전거로 끄는 인력거로 인도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주로 인도의 여성들이나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3) 오토릭샤(Auto-Rickshaw) - 오토바이를 3륜차로 변형시킨 것으로 대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미터기 부착이 기본이나 흥정을 통해서 타는 경우가 많다. 값은 흥정하기 나름이다.

 

. 택시(Taxi) - 차체는 전부 노란색인 것과 검정, 노란색이 반씩 칠해져 있다. 미터제가 기본이므로 출발하기 전에 차 바깥에 있는 미터기를 확인한다. 행선지와 시간대에 따라 값이 정해지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이것도 요금이 오르므로 교섭할 때에는 몇 대 정도를 알아보고 나서 요금이 싸고 사람도 좋아 보이는 차를 결정하는 것이 좋다.

* 참고- 인도 사람은 이상하게도 얼굴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 명확히 쓰여 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 시내버스 - 도시를 달리는 시내버스는 가장 싼 교통수단이다. 보통 1-2루피 정도 한다. 특히 대도시는 노선과 운행대수가 많아서 시민의 발 역할을 한다. 만약에 행선지를 확실히 알고 있다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한테 버스와 노선을 물어보면 된다. 번호는 대개 차체 앞과 승강기 옆에 쓰여있다. 봄베이에는 2층버스(Double Decker)가 있다. 이국적 향취를 느껴보기를 바랍니다.

 

. 전차 - 봄베이, 켈커타, 마드리드 등의 대도시에는 시내와 교외를 연결하는 전차가 운행한다. 이 전차도 아침과 저녁은 무척 복잡하다. 차안에서는 전문적인 소매치기에 조심하고, 여성은 여성 전용칸 Ladies' Coach에 타는 것이 안전하다.

 

. 통가(Tonga) - 한 마리 말이 끄는 2륜 마차이다. 델리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지방 도시에서 제법 이용되고 있다. 합승의 경우에는 일정한 지점까지 한 사람 당 얼마씩으로 가며, 사람 수가 5~6명 정도 모아지면 흥정하여 대절할 수도 있다. 단 통가가 들어갈 수 없는 곳도 있으므로 타기 전에 확인해 두어야 한다.

 

. 지하철 - 인도 켈커타에 지하철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우리 나라 것만큼은 깨끗하지 않지만 좋은 편이다.

 

5. 통화와 환전

해외여행을 한다면 주로 외화현금이나 여행자 수표(Traveller's check 혹은 T/C) 및 신용카드 등을 사용할 수 있다. 각기 나름대로의 장점들이 있다.

 

. 여행자 수표(T/C)

여행자 수표는 발행권에 금액을 써 놓은 수표의 일종으로 전세계 대부분의 은행이나 환전소에서 쉽게 환전이 가능하다. 분실이나 도난 때도 신고하면 반드시 곧 다시 교부 받을 수 있으므로 현금도난시의 손실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은행에서는 고객이 신청한 T/C실물을 판매통지서와 함께 교부한다. 교부 받은 T/C 실물에는 2군데의 서명난이 있는데 한 곳에는 구입시에 사인하고, 다른 한 곳은 사용시에 보는 이 앞에서 사인하게 된다. 동일한 사인이 있어야만 환전이 되므로 도난시나 분실시에도 본인이외에는 아무도 사용할 수가 없다.

분실시나 도난시에도 즉시 가까운 경찰서나 재발급 안내서에 적혀있는 신고처로 신고하면 재발급이 가능하다. 외국에서 현지 통화로 바꿀 때, 또는 남은 달렬ㄹ 다시 교환할 때의 환율은 확인해 두는 게 좋다. 인도에서 달러를 인도 루피로 바꿀 때는 T/C 쪽이 환전율에서 1% 정도 환전율이 유리하다.

* 1) 참고 - 인도는 암환전이 성행하는데, 현금만이 가능하다. 물론 환전율은 훨씬 높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따르므로 되도록 안하는 것이 좋다. 또한 환전소의 경우 작은 도시에는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미리 사용할 만큼만 미리 바꾸어두는 지혜가 필요하겠다.

* 2) 참고 - 환전증명서는 항공권 구입시나 호텔에서의 숙박시 제시를 요청할 수도 있으므로 버리지 말고 소지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 현금

현금은 안전상 문제가 있고 다른 통화와 환전할 때 환율상 불리하지만 소액 기념품의 구입이나 식당.호텔.공항 등에서 요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은 꼭 갖고 있어야 한다.

 

. 신용카드

신용카드는 현금이나 T/C와 달리 사용대금을 여행 후에 지불해도 되고 사용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자금 부담을 줄일 수도 있다. 또한 여행중의 뜻하지 않은 비상 사태에 대비해서도 해외여행을 할 때 꼭 준비해 가는 것이 유익하다. 해외에서 사용 가능한 카드는 VISA. MASTERS. AMERICAN EXPRESS. DINERS CLUB 카드 등이 있다. 카드 사용액은 국내와 해외 사용분을 합해 월 US$5,000 까지 이다. 그 이상을 사용하려면 여권 ,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직접 카드 발급점에 가서 인증을 받아야 한다. 비자카드 중 GOLD CARD는 여행중 분실하거나 도난을 당한 경우 비자카드 가맹 은행이나 외환은행의 해외 지점에 신고하면 24시간 이내에 US$3,000까지 긴급 현금 지급을 받거나 카드 재발급을 받을 수 있다. 일반 비자카드도 분실한 뒤 24시간 이내에 US$1,000까지 긴급 현금지급을 받거나 카드를 재발급 받을 수 있다. 신용카드는 상점에 따라 특정 카드만 사용할 수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홰외여행 때는 두 종류 이상의 카드를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 참고 - 인도의 경우 거의 모든 도시에서 카드사용이 힘들다. 델리나 봄베이 같은 대도시에서나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 환전

달러로 환전을 해서 가고, 인도 도착 후 공항 환전소에서는 환율이 좋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의 경비 50-100불 정도만 환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지 은행에서 필요한대로 환전해서 사용하면 됩니다. 한국에서 루피로 환전해 가는 것을 절대로 권할 만 하지 못합니다. 먼저 부피가 어마어마해질 우려도 있고 분명히 500루피 등의 고액권으로 가져갈텐데 그럴 경우 인도에서 돈 바꿀 만한 데가 없어서 고생을 할게 뻔합니다. 또한 '환전 영수증'을 가끔씩 요구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한국에서 했다"고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입니다. 따라서 돈은 달러로 100달러 몇 장과 50달러 등으로 가져가서 필요할 때마다 은행에서 바꾸어 쓰면 됩니다. 인도의 은행은 불친절한 공무원 사회의 표상입니다. 은행 시간도 가지각색인데 오전 10시에 열고 점심에 닫고 오후 두 시까지만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또한 지역마다 환전이 되는 은행이 모두 따로 있고 환율도 천차만별이니 잘 알아두어야 합니다. 여행자거리 주변에는 간이 환전소가 있는데 환율도 나쁘고 영수증도 안주지만 시간이 늦어서 어쩔 수 없을 때 등은 노력을 아껴주기도 합니다. 환전시에는 뭘 잔뜩 쓰라고 하면 써서 주고 토큰 같은 번호표를 받아 두었다가 돈주는 창구에서 받으면 됩니다. 그 시간이 얼마가 걸릴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또한 여행자 수표가 안전하다고 하지만 잘 안바꾸어 주는 곳이 많고 잊어버린다고 해도 그것을 보상해 줄 지점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 신용카드는 비상용으로 가져가는 것이 좋습니다. 꼭 국제용(internatinal)이어야 하는데 대도시의 ATM기에서 현금을 뽑아 쓸 수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성공한 사람은 그리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가끔씩 '씨티은행' 같은 것을 보았는데, 에어콘이 좋아서 들어가 쉬기는 좋습니다.

 

6. 음식 - 인도요리

 

. 카레가루가 없는 인도

4대 문명의 발생지며 5천년의 역사와 9억만 명의 인구를 가진 광대한 나라 인도. 인도 요리의 특징은 향신료에서 비롯된다. 열대지방에 속하는 인도는 풍성한 나무로부터 인도 특유의 맛을 내는 향신료를 만들어 조리하는데 사용했다. 나무 뿌리, 껍질, , 열매 모두가 향신료가 된다. 음식에 사용되는 향신료로는 월계수 잎, 고수풀 열매, 고추, 커민 열매, 계피, 카르다멈, 클로버(정향나무열매), 호로파씨, 박하, 겨자씨, 칼피처, 셀러, 타메릿(심황뿌리), 펜넬(회향풀), 샤프란, 백리향, 칼다몬, 넛머그(육구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이것들은 한약재로도 이용되는 것이라 건강에도 좋다. 이 재료들을 개인의 취향에 맞게 배합해 볶아서 향신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란색의 카레가루는 인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알려진 특유의 노란색 카레가루는 어디에서 나온 걸까? 오랫동안 인도를 지배한 영국인들은 여러 가지 향신료를 섞어 쓰는 인도요리가 익숙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식품회사인 C&B사에서 영국인들의 취향에 맞는 향신료만을 믹스해 만들어 보급했고, 2차 세계대전 때 전세계로 보급되었다. , 카레가루는 향신료에 익숙지 않은 서양에서 대중적인 입맛에 맞게 믹스한 것이다.

 

. 카레의 유래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카레(정식 명칭은 '커리' Curry)의 유래이다. 옛날 인도를 온 포르투갈인이 스프를 얹은 밥을 보고 뭐냐고 질문하자 인도 사람들은 수프의 건더기인 '내용물'을 묻는다고 생각하고는 카레(타미르 어로 '야채와 고기')라고 답했다. 이에 포르투갈인들은 카레가 요리 그 자체라고 믿고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카레라는 말로 전해져오고 있다. 속설이긴 하지만 인도에 커리라는 정식 음식이 없는 것으로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카레가 인도와는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다. 톡 쏘는 맛을 내는 인도의 믹스 향신료를 부를 말이 있는데, 인도 음식 대부분에 사용되는 '마살라(Masala)'라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된장과 같은 것이다.

 

. 우리에게 알려진 대표적인 인도 음식

인도의 주식은 북인도와 남인도에 차이가 있다. 북인도는 밀가루로 만든 인도 빵인 난 (Naan), 남인도는 쌀밥을 주식으로 한다. 난은 밀가루에 물과 소금만 넣고 탄두르에 구워내 는 평평한 세모 모양으로 만든 빵이다. 쌀도 일반적으로 하얗게 먹는 흰밥과 샤프란, 박하 잎, 닭고기를 넣고 볶은 '비리야니(Biriyani)'가 있다. 또한 버섯, , 당근, 커터즈치즈를 넣어 볶은 '필라프'라는 볶음밥도 있다. 인도 음식에 주로 쓰이는 용기인 '탄두리(Tandoori)'를 사용한 요리는 별미이다. 탄두리는 흙으로 만들어진 화덕을 칭하는 인도어로 24시간 동안 계속 숯불에 달구어져 있다. 이 옹기에 양이나 소, , 돼지고기를 바비큐 스타일로 구워지는 음식을 탄두리 음식이라고 한다. 닭을 요구르트와 고추, 커더멈, 정향, 계피, 커민씨드를 넣어 양념한 후 탄두리에 구워낸 탄두리 치킨이 우리 입맛에 맞다. 인도 대표격으로 알려진 음식은 역시 카레.(실제 인도에서는 카레라고 불리는 요리가 없다) 카레 요리는 양고기, 닭고기, 생선을 기본으로 소스로 쓰이는 양파, 토마토, 요구르트 등을 넣어 끊이고, 집집마다 취향에 맞게 배합한 향신료(기본적인 향신료는 마살라)를 넣고 걸쭉하게 끊이는데, 주식의 반찬으로 먹는다. 카레와 비슷한 '(Dhal)'은 부드럽게 삶은 콩에 마살라를 가미한 것으로 다양한 콩을 사용하며 콩에 따라 맛과 모양이 다르다. 이 외에 만두피에 야채나 고기, 치즈 등을 듬뿍 얹어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어내는 인도식 만두 '사모사', 고기를 갈아 볼이나 소시지 모양으로 만들어 탄두리에서 구워내는 까밥 등이 있다. 빼놓을 수 없는 인도 홍차 '차이(Chay)'는 찻잎에 우유와 설탕, 때로는 가지가 들어간 인도인들이 즐겨 마시는 차이다. 또 요구르트에 설탕과 물을 넣어 청량음료처럼 마시는 '라 시(Lassi)'는 단맛과 짠맛이 썩인 음료로 여성들이 선호하고 있다.

 

. 손으로 미각을 느끼는 인도 음식

인도에서는 식사할 때 개인 접시인 '달리'(놋쇠나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원형 쟁반)에 필요한 음식을 덜어서 먹는다. 접시 중앙에 밥을 놓고, 밥 주위로 카레요리나 기타 부수 요리들을 주변에 둘러놓는다. 인도 요리는 손으로 먹는 것이 정석이다. 오른손 검지, 중지, 약지를 붙여 밥을 뜬 다음 엄지손가락 손톱으로 입안으로 밥을 밀어 넣는다. 예의 범절을 중시하는 곳에서는 손가락 두 번째 관절까지만 사용하기도 한다. 오랜 경험 속에서 손으로 음식을 먹었으면 음식의 촉감과 온도를 입과 손 두 곳에서 느낄 수 있어 맛이 훨씬 좋다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 요리가 서양과 일본을 통해 전파되었기 때문에 일반 레스토랑에서는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한다.

 

7. 인도의 언어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다 아실겁니다. 분명히 고위층은 영어를 많이 쓰고 인도의 공식언어가 10개가 넘는데 그중 분명히 영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힌디어라 부르는 그들의 공용어가 쓰이고 있고, 지방마다 지방어가 모두 존재하는 실정이죠. 엘리트들이나 교육을 충분히 받은 사람들은 영어를 참 유창하게 하지만, 다른 일반 사람들은 기초 수준인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우리네 콩글리시와 비슷하게 '인도화된 영어'가 많죠.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들에게도 외국어, 우리에게도 외국어" 이니까요. 외국어끼리 부딪치는데 별일이야 생기겠습니까? 길을 모르면 "Where is 어디?" 라는 식으로 물어보면 되고, 방을 원하면 "single room?"이라고 물어보면 되고, 값을 모르면 "How much?"라고 물어보면 됩니다. 물론 힌디로 1에서 10까지와 간단한 인사말을 알고 있으면 가격흥정이나 인도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데 무척 좋습니다. 힌디어 배우는 책을 인도 서점에 가면 싸게 구할 수 있는데 한권 사서 가끔씩 꺼내들고 읽어보세요. 주변의 인도 사람들이 친절히 가르쳐 주며 금새 친구가 된답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저는 영어보다는 한국말로 그들에게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인도말로 제게 응답하지요. 눈만 쳐다보면, 모두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지어를 배우기가 쉽지 않고, 영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단기여행을 위해서는 그냥 영어정도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체류를 고려한다면, 북인도를 겨냥한 공용어인 힌디나 남인도에서 지배적인 타밀어를 공부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현지어는 학원을 이용하면 일주일에 두시간씩 6개월을 공부할 경우 50루피, 2,000 원 정도로 배울 수 있다.

 

8. 자주 묻는 질문들

. 인도는 혼자가면 위험하지 않나요?

인도 여행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안전"입니다. 하지만 많은 인도여행자들이 증명하듯이, 인도에서 "위험한 짓"만 안하면 충분히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오히려 유럽쪽보다는 '강도,소매치기'등의 위험이 적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를 보는데 '선입견'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은 단순한 물질적 부의 차이만 보기 쉽죠. 인도의 부자는 우리보다 더 부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인도의 거지는 우리보다 마음이 더 부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의 삶의 태도를 우리의 잣대로 "거지 나라"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좋은 예로 "인도에서 열차가 탈선했다"라는 기사가 나면 "인도 같은 후진국이니까.. 인도는 위험해."라고 말하죠. 하지만 탈선 사고는 우리도 많이 나고 다른 선진국에서도 자주 있는 일입니다. "영국에서 탈선사고" 라는 말이 나오면 "어쩌다 그랬겠지.."하는 관용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인도는 세계 몇 위의 철도 대국입니다) 여행을 혼자 하는 것은 그리 위험하지 않습니다. 물론 둘 정도가 같이 가도 좋겠죠. 하지만 인도를 여행하는 많은 수의 여행자들이 혼자 다니며 고독을 즐기기도 하고 곳곳에서 의기투합해서 다시 팀을 이루기도 합니다. 여행의 즐거움은 바로 그것입니다.(1999/4/15)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면 한인동호회(http://www.india.co.kr/)로 가서 "길동무 구함"난에서 같이 여행갈 분을 찾을 수도 있겠지요. (1999/6/2)

 

. 돈은 얼마나 필요한가요?

지구상에서 제대로 된 여행을 하면서 가장 싼 곳 중의 하나가 인도가 아닐까 합니다. 태국이 싸다고 하지만 인도와 거의 두 배정도 차이가 납니다. 먼저 비행기표 값은 2개월 오픈티켓(2개월 안에만 돌아오면 됩니다)50만원 안팎입니다.(ANA 항공의 경우). 여기에 인도에서 출국할 때 공항세를 더해야 합니다. (인도 비행기 티켓에는 공항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500루피 정도니까 그때그때 환율에 따라 다릅니다. 그리고 하루 체제비는 이동경비까지 모두 합해서 10달러 정도를 예상하면 됩니다. "겨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돈을 모두 다쓰면서 다닌 여행자가 있다면 분명히 "초호화판" 생활을 한 셈입니다. 저의 경우 첫 번째 인도여행 때는 한 달동안 방콕을 경우해서 오면서 멋도 모르고 썼어도 총 300달러 (방콕 1박에 50달러가 날아갔죠)를 썼고 두 번째는 40여일을 배불리 먹고 방콕에서 "투어"까지 했는데도 270달러 안팎을 썼습니다. 준비해갔던 돈은 고스란히 통장에 남아 있어서 "다음 번"을 기약하고 있지요. 하루에 10달러라면 400루피 정도 되는데, 하루 숙박비로 100루피 내외, 한끼 식사에 20루피 내외를 할당하고 나머지 돈은 알아서 쓰면 됩니다(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여행이 아니고, 장기 체류할 경우 대략 개인적으로 한 달에 지출하는 비용은, 숙박비를 제외하고 50 - 100 불 정도면 충분합니다.

 

. 숙식은 어떻게 해결합니까?

역시 잠이 문제입니다. 인도는 여행자의 천국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도시마다 여행자 거리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뭄바이의 경우는 '꼴라바 구역'이라 불리는 곳으로 그 유명한 '타즈마할 호텔'이 있는 거리가 있고, 델리의 경우는 델리 역 앞의 시장거리가 여행자 숙소가 많습니다. 캘커타는 '서더스트리트'라고 불리는 곳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여행 안내책자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혼자 여행할 때는 보통 싱글룸을 잡게 되는데 지역마다 차이가 큽니다. 보통 150루피에서 200루피 안팎을 보면 되지만 화장실을 공동으로 쓰느냐 (CB:common bathroom) 방에 딸렸느냐 (WB:with bathroom)에 따라 가격차이가 큽니다. 물론 창문이 있느냐 (window room, view room) 없느냐에 따라서도 가격차이가 있지요. 더블룸의 경우는 싱글룸 두 개보다 당연히 쌉니다. 침대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는데, 방이 없을 때는 더블룸을 싱글룸 값에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넓고 넓은 침대에서 뒹구는 여유도 가질 수 있지요. 도미토리라 불리는 합숙방은 YMCA의 유스호스텔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열악한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대도시에의 방값은 잔인할 정도로 비싸기 때문에 대도시에서는 도미토리를 이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캘커타의 경우 하루 60루피 안팎으로 깨끗한 침대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품 보관에만 주의하면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도 있고 남들이 여행하는 스타일도 구경할 수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됩니다.

인도의 주식은 쌀입니다. 하지만 흔히 '불면 날아가는 쌀'이라 불리죠. 끈기가 없고 길쭉해서 먹어도 별로 배가 안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들이 '정식'으로 삼는 '탈리'를 먹어보세요. 처음에는 좀 역겨운 냄새가 나는 것도 있지만 익숙해지면 한끼에 15루피 남짓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밥과 커리(카레)를 따로 시켜서 먹어도 되는데, 인도커리요? 꼭 먹어보시길... (킬킬) 그밖에도 간식거리로 길거리에서 파는 게 많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계란 삶은 것도 팔고 오물렛이라고 해서 계란 후라이도 팝니다. 엿 비슷한 과자도 있고 비스켓, 식빵, 바나나, 망고 등등의 먹을거리는 천지입니다. 가격도 싸죠. 코카콜라, 펩시콜라, 미린다 등의 음료는 많습니다. 하지만 10루피에서 15루피까지 하는데 한끼 식사 값으로 음료수 한 병(200ml)을 먹는게 참으로 아깝지요. 하지만 기운을 내려면 먹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안들어가는 음식을 콜라 한 병으로 우겨 넣으며 "살아야 한다"를 외치는 경험은 색다를 것입니다.

 

. 물은 어떤가요?

우리도 한때는 '어느 나라에 가면 물을 사먹는다' 하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결국 물을 사먹는 시점에 와 있죠. 인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인도사람들이야 길거리에서 나오는 펌프 물을 그냥 마셔도 끄떡없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그걸 먹으면 평소 장이 웬만큼 튼튼하지 않고는 "폭포수 같은 설사"를 며칠간 해야 합니다. 인도에서 한번쯤은 당하는 것이지만 며칠동안 아무 것도 못 먹고 설사만 하다보면 살이 무척 많이 빠집니다. 물은 1리터짜리가 10루피에서 15루피정도 하는데 무척 비싼 편이죠. 미네랄워터라고 하지만 수돗물을 정제한 것이고 여러 가지 상표가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면 속여서 판다고는 하는데 저는 아직까지 '사먹은 물 때문에' 탈이난 적은 없습니다. 얼려 놓은 물도 있는데, 이것은 처음엔 참 좋지만 녹은 후에는 물맛이 영 아니라서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물을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힘들지요. 하지만 필수라서 이동을 할 때는 (가까운 마을도 5시간 정도 이동하고 웬만하면 10시간 이상을 갑니다) 반드시 미네랄워터를 한 병 사서 품에 꼭 끼고 다녀야 합니다. 그게 가장 힘이 들지요. 물을 끓여서 먹는 방법도 있지만 그런 기구를 들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인도에서는 힘이 들 때가 많습니다. 돈을 가장 많이 아끼려면 가는 날로 식당에서 주는 물 한잔을 들이키세요. 그리고 나서 면역이 되면 하루에 20-30루피는 아끼는 겁니다. 물론 휴유증은 전혀 책임질 수 없습니다.

 

. 필요한 물품들은 인도에서 살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화장지나 비누 등은...

물론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은 보장하지 못하죠. 인도 사람들의 뒷처리 방법은 익히 들어 알고 계실 터이니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우리에겐 화장지가 절실한 문제입니다. 그걸 한국에서부터 싸 짊어지고 간다면 그 부피로 인해 가방은 더 커질 것이고 커진만큼 고생을 죽도록 하게 됩니다. 제 경우는 여행용 티슈 두 개와 20개들이 물티슈 두 봉지로 한달 이상을 버티는 노하우가 생겼지만 화장지가 필요한 분은 여행자거리 곳곳의 가게에서 조달할 수 있습니다. 그냥 눈 딱 감고 쓰세요. 뭐 이곳에서 우리나라처럼 좋은 화장지를 기대할 수는 없지요. 세수 비누도 있고 빨래 비누도 물론 있습니다. 2루피부터 10루피까지 다양한데, 인도 세탁비누의 성능은 대단해서 제 청바지를 모두 탈색시켜서 흰 바지로 둔갑시킬 정도입니다. 파란색 비누로 빨래를 하다보면 어느 비누가 좋은 것인지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보는 거의 모든 것은 인도에도 다 있습니다.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살 수 있습니다. 열쇠고리형 오락기도 물론 있습니다. 인도 부자들은 그런 것 가지고 다니는데 제가 오히려 신기하게 보니까 자랑스럽게 뻐기면서 하더군요.

 

. 도난방지용 쇠사슬과 열쇠를 사서 가야하나요?

쇠사슬은 현지에서 싸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쇠는 한국에서 사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인도의 기차여행 문화는 우리와 다릅니다. 먼저 가방을 대여섯 개씩 들고 다닙니다. 그 큰 트렁크 안에는 며칠동안 먹을 음식과 옷, 베개 등등이 들어 있습니다. 그걸 짐꾼까지 동원해서 기차에 싣습니다. 실을 수 있는 모든 장소에 넣고는 자리마다 마련되어 있는 고리에 쇠사슬로 칭칭 묶고 자물쇠를 채웁니다. 여행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그러니 쇠사슬은 어디에나 팝니다. 20루피(800)정도면 충분히 좋은 것을 살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자물쇠는 국산을 가져가세요. 가방은 지퍼가 두 개 달린 것을 사셔서 작은 자물쇠로 잠그면 되고 큰 자물쇠는 숙소의 문을 잠그는데 유용합니다. 숙소에서 주는 자물쇠는 잠그기도 힘들고 열기도 힘들어서 안 그래도 더운데 더 덥게 만듭니다. 그리고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도난의 염려도 없습니다.

 

. 인도에서 한국으로 전화는 어떻게 합니까? 편지는? 가격은? 인터넷은?

인도는 아직까지 공중전화 문화가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곳곳에 공중전화 비슷한 것을 놓아놓고 전화 영업을 하는 '전화방'이 많습니다. STD/ISD라고 쓰여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인데 곳곳에 있습니다. 여기에 들어가서 번호를 주고 조그만 공중전화 박스 같은데 들어가면 전화벨이 울려서 받게 됩니다. 통화가 끝나면 밖에서 '몇 분 몇 초' 얼마 식으로 돈을 달라고 하는데, 이게 아주 천차만별입니다. 미리 '1분에 얼마인가'를 물어보고서 나중에 계산해 봐야 하는데, 사기를 치는 경우에는 그곳의 시계마저도 빨리 가도록 해 놓기 때문에 자신의 시계로 정확히 시간을 재야 합니다. 나중에 계산서를 보면서 시간과 요금을 정확히 계산을 하고 만약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바로 항의를 하셔야 다음 번에 거쳐갈 한국인(혹은 일본인)들이 손해를 보지 않겠지요. 얼마라고 말로 하면서 돈을 요구하거나, 일반 영수증에 볼펜으로 가격을 적어서 돈을 요구하면, 정식 영수증을 요구하면서 돈의 지불을 거절해도 됩니다. 이 경우(돈을 주지 못하겠다고 할 경우) 대부분 정식 영수증을 주면서 그곳에 나온 대로 돈을 요구할 것입니다. 콜렉트콜(수신자 부담)도 가능한데, 웬만한데서는 안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캘커타 등지에서는 1분에 3루피정도(이건 왜 받을까)를 내면 데이콤이나 한국통신을 통해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걸게 해줍니다. 한국 교환원이 나와서 물어볼 때의 감격은 어설픈 영어로 고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르죠. 그런데 주의 할 것은 1통화의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 이하로 할 때는 무조건 똑같은 요금을 내게 됩니다. 3분인가 그런데 저는 30초만 하고 끊으면 쌀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가 나중에 요금고지서 보고 땅을 치고 통곡했습니다. 여러분은 미리 데이콤에 전화해보고 알아본 뒤에 사용하시길... . 한국으로 전화걸 때 지역번호의 0은 빼는거 아시죠? 우리나라 국가코드는 82번입니다.

[참고자료] 인도에서 한국으로 수신자 부담으로 걸 때 한국 교환원이 나오는 서비스 사용법입니다.

* 데이콤 (터치터치 콜렉트콜) : 0008217 * 한국통신 (한국 직통전화) : 0008227

* 요금 (한국통신과 데이콤 동일): 최초 3-> 6,620(번호통화), 8,280(사람을 지정했을 때)/ 추가 1-> 1,660

편지는 당연히 곳곳에 있는 우체국에서 부칩니다. 거기에 가면 봉투와 편지지도 팝니다. 편지는 11루피(정확하지 않음)정도의 우표를 붙이면 되고 우편엽서는 6루피짜리를 붙입니다. 돈을 절약하고 싶으면 봉함엽서(봉투 값과 종이 값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라는 것을 사서 부치면 됩니다. 한끼 식사가 15루피 남짓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돈이죠. 그리고 우표를 부치고 나서 우체국 직원이 도장찍는 것까지 확인을 하라고 가이드북에 쓰여 있습니다. 확인해서 나쁠 것은 없겠죠. 한국까지 편지가 도착하는 시간은 보통 2주를 잡으면 됩니다. 운이 좋으면 더 빨리 가기도 하구요. 소포의 경우는 책이나 그런 것은 별 문제가 없겠지만 좀 희귀한 물건이나 값나가는 물건이 도착할 확률은 거의 적습니다. 인도로 가는 DHL등도 도난이 잦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가는 부분이죠. 웬만하면 들고 들어오고 더 웬만하면 짐은 막판에 만드세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큰 가방 하나에 온갖 물건을 다 넣고 1000루피 이상을 주고 배편으로 부쳤는데 1년이 가까이 되어 가는 오늘까지 도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도시에는 인터넷 카페도 있습니다. 특히 캘커타나 델리의 여행자 거리에는 성업중입니다. 1분에 3루피 정도의 높은 가격이긴 하지만 사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영어로 E-mail을 주고받거나 할 경우에는 hotmail.com 등에서 미리 계정을 발급 받아 놓는 것이 좋습니다.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태국 등지에는 한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깔아 놓은 곳이 몇 군데 있지만 인도에서는 찾기가 힘이 듭니다. Telnet 등을 사용하면 천리안이나 하이텔 등에 접속할 수는 있지만 온통 깨진 문자들 뿐이라 그리 도움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 인도는 언제 여행하는 것이 좋습니까?

인도는 보통 겨울(12월에서 2)이 여행 성수기입니다. 그때의 날씨는 우리나라 가을날씨 정도보다 약간 더운 정도로 아주 상쾌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여름에 해당하는 7월 정도는 우기라서 비가 많이 내리고 무척 덥습니다. 물론 그 이전 4월부터 6월 사이는 최고 더운 날씨여서 인도 사람들도 북쪽으로 피서를 간다고 합니다. 저의 경우는 두 번 모두 7월부터 8월초까지 여행을 했습니다. 우기라 하더라도 비가 늘 내리는 것이 아니고 장대같은 비가 화끈하게 내리고 다시 햇볕이 쨍쨍 찌는 식의 날씨라서 순발력만 있으면 여행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물론, 하루 종일 비만 보는 운 없는 날도 있지만 숙소에 앉아서 작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거리를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지요. 물론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엽서 한 장을 띄울 시간도 되구요. 여름에는 히말라야로 올라가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 쪽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꼭 전문 산악인이 아니더라도 간단히 뒷산 오르는 기분으로 해발 3000미터 이상 되는 곳의 마을에 오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일겁니다. 옆을 보면 천길 낭떠러지인 1차선 도로를 몇 시간이고 올라가는 고물버스에 한시간만 타보면 누구든지 신의 존재를 믿게 된다는 군요. 처음에는 청룡열차 타는 기분이겠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곧 잠에 빠져들게 되지요. 여행적기는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인도 북부를 그냥 돌아볼 생각이라면 (한 달로도 물론 벅차지만) 겨울 쪽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 인도 여행을 할 때 준비해갈 물품

-한영성경 및 찬송가, 영한-한영사전, 다이어리

의류-인도현지에서 거의 모든 종류를 살 수 있고, 장기체류시 인도의 전통의상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최저15도에서 최고 40도 이상의 기온에 대비하되, 주로 여름옷을 중심으로 하고, 설교할 경우를 대비하여 단정한 와이셔츠 등을 준비하면 좋다. 정장은 특별하게 필요하지 않다.

침구-현지에 있는 것을 이용하면 충분하지만, 침낭 정도는 준비하는 것이 좋다.

의약품-상비약은 대부분 인도에서 구할 수 있으나, 자신에게 맞는 감기약, 소화제, 지사제, 연고, 물파스, 1회용 밴드 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기타 - 목욕타월, 소형 카세트, 손전등, 면도기, 다용도 나이프, 잠금 장치가 있는 중형 배낭, 여행용 샌들, 구두, 반짇고리, 고추장, 된장, 카메라, 필름(슬라이드용), 기타 줄과 피크, 손톱깍기 등 등.

* 부록2는 일부는 “http://members.tripod.co.kr/india - 인디아 이야기에서 정광현(hangulo@chollian.net)님의 글을, 일부는 인도 견습선교사를 다녀오신 주성학님의 글을 요약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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